단문
[아포에브] 시
마카나래
2017. 6. 10. 20:13
※ 공미포 7757자.
! 소멸 소재 有
!! 개똥철학 주의
"…에브루헨."
[아포에브] 시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갈 뿐이다. 그 모든 것에 의의를 두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언젠가 그가 내게 속삭이곤 했다. 그러면 나는 웃었다. 맞아요. 그래도 난 버릴 수 없는 게 너무 많아요.
나는 사라진다.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여신이 정한 섭리였다. 나는 사라져 마땅할 존재였고, 그렇기에 내게는 소중한 것이 아주, 아주 많았다. 영원히 함께할 수 없기에 덧없으며 안타까운 것이 너무 많았다. 내가 존재했음은 머지않아 지워지기에. 아침의 눈꺼풀을 두드리는 볕, 조용히 흐트러져 기분 좋은 소리를 내는 나뭇잎, 뺨을 스치고 지나는 바람과 같은 것들이, 저들끼리 소소한 일에도 환히 웃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는 그리도 신기했고 그들을 보살피고 싶었다.
그건 그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그는 내게 여전히 나였다. 어긋나버린, 그러나 여전히 눈이 가는 이였다. 그는 아끼던 말조차 버려 거의 말을 잊은 것처럼, 아니, 아예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나간 것처럼 지냈다. 거처조차도 그랬다. 폐허, 그는 주로 스러진 마을에 있었다. 무너진 건물이 지붕도 없이 올라서있는, 분수대의 석상이 으직 부서져나간, 바닥에 콘크리트 조각이 굴러다니는, 그런, 곳에. 그는 바닥을 디디지도 않고 그렇게 있었다. 마을 내에 그가 자리하는 곳은 언제나 불규칙했다. 언젠가는 분수대의 곁, 언젠가는 폐가의 담장, 언젠가는 시계탑의 위, 언젠가는 골목 사이. 난 그 적막 속에서 내 발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계속 움직이며 걸었다. 숨바꼭질을 하는 기분으로, 때로는 무언가를 흥얼거리기도 하며 걸었다.
그러나 한 때는 온 마을을 구석구석 돌아다녀도 그가 보이질 않았다. 그럴 때는 그 곁의 숲에 눈길이 갔다. 보통 숲길은 그런 분위기를 자아내지는 않는다. 푸른, 녹빛을 띠긴 커녕 온통 갈색이었다. 불안한 검은색, 갈색의 길. 불이 나기라도 했었는지 나무들이 한결같이 검었고, 흙 역시 대체로 어두웠다. 나무는 다 죽은건지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버석거리는 흙을 밟아가며 몇 십분을 걸었다. 발이 뜨겁다고 느껴질 즈음엔 나무들이 조금씩 사라졌다. 이윽고 길이 끊기면 스치는 호수는 시야에 다 담기지도 않게 컸다. 그는 거기에 있었다. 정확히는 그 호수를 보며 나무에 기대어 있었다. 나는 그가 무얼 보는지 몰랐다. 호수를 보는 게 아니라 그저 시선을 호수에 둔 것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는 내가 곁에 서더라도 돌아보는 일이 없었다. 발소리를 내든, 내지않든 그는 눈길조차 내지 않았다. 늘 내가 그의 눈 앞에 서야 했다. 날 봐요. 그래야만 그 눈이 굴러 내게 향했다.
나는 언제나, 그에게 할 말을 골라야 했다. 그냥 내뱉는 일은, 그 어느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사실이나 그에게는 특히, 할 수 없었다. 내가 던져놓은 말들이 어떻게 다가갈지 모른 탓이다. 그는 어둡다면 어두운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이 움직이는 일이 없더라도 그가 느끼는 게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부정적인 것들에 익숙할 그에게 닿는 말이 어떨지 나는 몰랐던 탓이다. 그렇기에 나는 아주 사소한 말을 했다. 그에게도, 내게도 아주 연관이 없을 말만을 하려 했다. 그가, 내가 겪은 모든 일은 전부 제하고자 했다. 엘수색대, 마족, 엘, 신, 그런, 것들은 모두 삼키고 날씨, 기분, 마을에서 겪은, 본 일같은 아주 사소한 것만을 전하려 했다. 그렇게 해야만했다.
안녕? 내가 그에게 인사를 건네면 결과는 둘 중 하나였다. 그의 고개가 끄덕이거나, 그조차도 하지 않거나. 꽤 자란 앞머리에 눈이 가렸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곁에 섰다간 그의 머리카락에 눈이 닿곤 했다. 땋아내리던 머리가 이젠 그저 흩어져 있었다. 자연스레 뒤엉킨 머리카락이 저들끼리 얽혀 있었다. 네 머리카락, 땋아봐도 되나요? 그런 말을 한 것 같다.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혹은 듣지 않은 듯 고요히 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그의 모든 것에 대해 알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그건 의사표현이라고 다르게 적용되진 않았다. 풀썩 앉았다. 네게 내가 닿아도 괜찮아요? 다시 한 번, 물었다. 그제야 그는 옅은 목소리를 냈다. 탄식같은 어떤 말이 흘러 가라앉았다. 하고싶은 걸 해. 빗은 있으면 신기했을테다. 손으로 머리를 쓸어내렸다. 머리카락은 생각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생각보다도 더 푸석했다. 몇 가닥이 쓸려나오다 말고 그대로 떨어져버렸다. 세 갈래로 나눠잡은 머리카락을 하나둘씩 얽어놓았다. 어차피 끈은 없었고, 언젠가는 풀릴 일이었다. 묶어놓는다해도 그가 계속 하고 있을 이유도 없고, 곧 풀어버릴테지. 그런 생각을 했다. 별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날따라. 그러고 싶었다.
손을 거두었다. 거울이 없네요, 미안해요. 중얼거리듯 한 말에 그는 달리 반응하지는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다… 몸을 옮겨 호수로 걸었다. 그의 발을 감싸는 것이라곤 얇은 천 하나 뿐이라, 발이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나무를 짚고 몸을 밀어냈다. 그가 죽은 잔디 사이에 낸 발걸음을
종종걸음으로
조금씩 짚었다. 그는 호수 위에 떠 있었다. 그러고보니 그게 처음이지 않았던가. 그가 그 호수 위에 선 적은 없지 않았나. 알아차릴 새는 없었다, 어차피 금방 다시 돌아왔으니. 마음에 드나. 그가 속삭이곤 했다. 나는 웃었다. 글쎄요. 그의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는 일은 드물다. 그는 발을 디디고 섰다. 사박이는 소리가 났다. 바람이 코 끝을 간지르고 지났다.
너는 인간이 아니야. 귀 바로 곁에서 그런 말이 들렸다. 웃음이 샜다. 다시 시야 안으로 들어온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듯 평온했다. 인간이 되고자 한 적은 없어요. 말을 했던가. 그때 무슨 말을 읽었지. 탐탁치 않은 얼굴이었다는 것만 알았다. 살짝 얼굴을 일그러뜨리곤 했다. 왜 그래요, 내게. 그는 그저 돌아섰다. 그럼, 버려. 바람이 실어준 목소리에 얼빠진 반문이 나왔다. 알아듣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는 다시 돌아 날 마주했다.
전부는 안 될테지. 하지만 넌 너무 많은 것을 안고 있어. 그것들이 흘러 네 발목을 자르고 나서야 네 팔을 내려다볼건가? 그런 말을, 그가 내게 했다. 하.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탄식도, 조소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잠깐 얼굴을 쓸었더니 손끝이 차가웠다. 그 앞머리 아래로 드러난 암녹의 눈이 내게 향해있는 것을 보았다. 땋았던 머리카락이 어느샌가 풀려있는 것을 봤다. 알고 있었다.
어차피 조각날텐데, 발목쯤 좀 일찍 잘린다고 달라질 게 있겠어요.
나는 그런 말을 했다.
아무래도 좋을 일일지도 몰랐다. 어느 결과가 나오든 상관이 없는지도 몰랐다. 실로 불행할 운명이라면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즐거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아서. 남길 수 없었으니까. 나는 그랬다. 어떤 고문처럼 끔찍한 사실로부터 도망치는 것에는 진즉에 익숙해져 있었으나, 마주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이제서는 이럭저럭 남의 일을 보듯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 그즈음이 되어서야 그가 내게 말하곤 했다.
인간이 아니다. 나는, 그는,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내가 이상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오류였을지도 모른다.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인가? 그렇다고 생각했다. 여신께서도 이 세상의 모든 변수를 통제하실 수는 없을 테니까. 나는 말을 들었고, 따라 어떤 말을 던져놓았다. 몇 번인가 의미없는 대화가 오가기도, 의미가 있었을지 모르는 대화가 오가기도 했다. 언성이 높아질 일은 없었다. 그는 지쳐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 같았다.
생물은 죽으면 땅으로 돌아간다고 여느 노파가 말했다. 돌아간다고 했다. 땅으로부터 나온 그 모든 것은 돌아간다고 했다. 순환한다고 했다. 나는 여신이 만든, 여신이 땅으로 내려보낸 것이었다.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것. 그런데, 그것은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살아있다는 건 무엇이지. 나는 매밤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타닥타닥 허공에 흩어지는 불씨를 보며 그런 생각이나 했다. 수면, 식욕, 그런 걸 나는 잘 몰랐다. 요가 살갗 위를 흐르는 소리는 고요를 깨뜨렸다.
아마도 그의 기운을 희미하게 읽었던 것 같다. 발을 온전히 디디지 않고 자리에서 나왔다. 아이트는 가끔 등불을 대신하기도 했다. 밤의 숲은 생각보다 무섭고, 생각만큼 서늘하고, 생각보다는 안락했다. 사람이 자주 오가는 곳이었는지 길이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발소릴 내지 않았다. 아이트의 빛이 일렁였다. 바람이 아주 약하게 머리를 스쳤다.
나는 고개를 든다. 웃었다.
아마도, 그가 내 근처에 온 일은 처음이었을테다. 우연이더라도 그랬다. 아이트에 비치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삭막했다. 나무 위에서 내려온 그는 물었다. 왜 웃느냐고 말했다. 기뻐서요. 대답은 짧았고 그는 말하지 않았다. 아이트를 흩뜨려 없앴다.
나는 어떤 말을 해야할지 재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으면 오히려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법이다. 오랜만이네요, 부터 엘소드는 잘 지내요, 를 거쳐, 네 말이 듣고 싶어요, 까지. 온갖 문장들이 떠오르다간 도로 가라앉았다. 그가 나와 얘기하고 싶었는지는 아직 잘 모른다. 애초에 그가 제 의견을 펴놓을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던 탓이다. 그는 방관을 자처했고, 실제로 그리 했다. 그는 내가 아니었고, 나 역시 그가 아니었다. 그는 날 바라보지 않았고, 나는 그에게 해가 될 생각들을 전부 죽였다. 그렇게 그 모든 것들은 묵인되었다. 아주 짙은 구름 하나가 달을 완전히 가렸다. 금방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오늘은. 겨우 말을 꺼내놓았다. 아무리 익숙해졌다하더라도 빛 한줌 없는 어둠 안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법이다. 비가 올지도 몰라요. 그런 말을 소곤거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눈 하나 깜빡이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아니, 실은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침묵이 이어졌다. 왜. 하는 형식상의 의문 마저도 표하지 않았다. 그건 언제나 그런 일이었다. 늘 끝없이 나 홀로 허공에 말을 뱉으면, 그가 내 말조각들을 끌어안는지 아니면 그대로 땅에 곤두박질치도록 두는지 나는 몰랐다. 상관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곤 했었고, 했다. 항상 처음부터 끝까지 그랬다. 부러 말을 낮추었다. 얕게 하는 말들을 그가 전부 듣는지는 미지수였다. 무슨 말을 했었지? 나는 잘 떠올릴 수가 없다. 아마도 요즘 많이 추워졌다느니, 우박이 왔었다느니 하는 별 시덥잖은 말이었으리라. 그러다 문득 확인차 말했다. 듣고 있어요? 보통 돌아오는 답은 아니, 혹은 아예 없었다. 아니, 겠거니 했다.
그래. 짧고, 생각이 담기지 않은 말이 곁에서 튀어올랐다. 구름이 걷히는지 눈앞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주 조금 밝아졌다. 얼굴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나는 걸 보고만 있었다. 그의 고개가 아주 조금 돌아 내게 향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뭐냐는 짧은 물음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어야했다.
문득 시야가 꽤 밝아졌다는 생각을 했다. 항상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식이었던지라, 나는 이제 막 나무에서 떨어진 그를 불러 세워야했다. 가는 거냐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마 그는, 공간을 뒤틀어 이동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대로 떠올라 멀어졌던 것 같다. 손을 흔들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그는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사라지리라는 걸 알았고, 실제로 그리 했다. 종종 걸어 자리로 돌아왔다. 잠이 좀체 없는 편이었던 몇몇이 이미 깨어 있었다. 어디 다녀오냐는 말에 잠깐 생각할 게 있었다는 말만 했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파악하기 어려운 사람 정도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는 고개를 젓는다. 나는 말을 멈추었다. 그의 행동이 내 말의 부정인지, 아니면 홀로 하던 생각에의 부정인지 나는 잘 몰랐다. 나는 그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반 개쯤 띄울 뿐이었다. 그는 어떤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의 침묵은 익숙했기에 나는 별달리 묻지 않았다. 대신 말을 그칠 뿐이었다. 어떤 생각들은 이어나가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되곤 한다. 범람하는 생각은 홍수처럼 누군가를 집어삼키기도 한다. 나는 어쩌면 무슨 말을 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정말로,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표류하는 구름에 바람을 불어넣어 흩뜨려버리고 싶곤 했다. 유치한 생각들을 하곤 했다.
여신께서는 우리를 죽였다. 애초에 우리는 죽을 운명이었으니. 우리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몸뚱이로 그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정확히 하자면, 마지막까지 그리 하는 건 나뿐이었다.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건 종종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주 드물었고, 때로 아주 흔하기도 했다. 그러니 아주 극단적이었다. 기껏 골라왔던 말들이 전부 발치에 떨어져 조각나 부서지고, 공기를 타고 흘러가버린다. 모든 일들이 생각대로 흐를 수는 없다. 그러니 나는 그에 대해 어떠한 불평도 할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 불러들여왔던 붉은, 푸른 아이트를 전부 깨뜨리고 노란 아이트를 피워냈다. 내부의 정화는 그의 일이었고 외부의 치료는 내 일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당연할 일일지도, 어쩌면 저주받지 않을 일일지도… 여신이시여, 당신을 저버렸다 하더라도 그도 결국은 당신의 창조물일테니. 어쩌면 금기와 비슷한 일을 저지르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아니, 사실, 나는 확신이 없었다. 아직 그 머리를 땋고 다닐 적의 그는 오히려 완전한 엘의 힘을 거부했다. 오히려 신체 내부에서 반작용이 일어났다. 그게 여전한 사실일지가 두려웠던 탓이다. 어쩌면 더 확장되었을지 모른 탓이다. 그렇다고 선지가 있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노란 빛이 사방을 가득하게 메우고, 점차 사그라들어도 그는 가만히 있었다. 박제된 것처럼.
문득 그의 주변에서 빛이 일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안 좋은 꿈에서 깨어나듯
갑작스레 눈을 떴다. 일어났어요, 말이 목에서 턱 막혔다. 눈을 깜빡이는 사이 그가 사라져 있었다. 뒤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면 그는 그저 서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검은 파편을 품은 소용돌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성난 바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어딘가 불편해보였다. 이제 생각해보면 그는 괴로워했던 것 같다.
나 때문이에요? 내 물음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긍정, 부정, 혹은 어떤 망설임. 나 때문이었다. 그의 곁에 아무것도 남지 않고서야 다리를 움직였다. 미안해요. 말이 얕았다. 그는 말을 아꼈다. 그가 아직 간헐적으로 불안에 시달리던 나날들을 떠올렸다. 새삼스럽게 깨달았던 건 그즈음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바랬다. 빛을 잃어 탁해진 눈을 한 그는 내게 손짓을 했다.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안 해요? 순환은 나보단 네가 잘 하는 일이잖아요. 그제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디딘다. 걸음이 영 낯설었다. 거대한 보석을 보며 느낀 감정이 뭐였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 그는 곁의 기둥에 기대곤 내가 하는 양을 보고만 있었다. 내가 그랬듯이, 말은 걸지 않았다.
살갗에 느껴질 정도로 기운이 짙어진다. 머리가 좀 어지러운 느낌이 들고서야 파각, 하는 소리가 났음을 깨닫는다. 손끝이 희미하게 부서졌다. 돌아보면 그는 답지않게 놀란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피식 웃음이 샜다. 끝났어요. 그는 비틀거리며 섰다. 하, 헛웃음 소리가 울렸다. 그의 얼굴이 그런 빛으로 물드는 건 처음이었다. 그건 무엇이지? 허망함, 혹은 절망감, 혹은. 나는 잘 알 수 없었다. 잠시 그를 지켜보다 발을 떼어 그를 스쳐지났다. 그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아마 할 일이 남아 있었냐는 뜻이었으리라. 나는 웃었다. 그냥 좀 걷고 싶어요.
정말로 나는 그냥 걸었다. 신전을 나와 발이 가는 대로 걷기만 했다. 어쩐지 그도 나와 함께 걸었다. 그는 나보단 사라지는 속도가 빨랐다. 후회는 없어요? 없어요. 거짓말, 여기부터 펴고 말해요. 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스쳤다. 그는 여전히 찡그린 채 말했다. 그러는 너는 없나요? 하고. 나는 벌써 오랜 옛적에 가다듬었거든요. 웃는다. 난 인간에게 우호적인 편이에요. 내가 지워져도 그들이 기쁘게 살 수 있으면, 괜찮아요. 우뚝 그가 멈춰선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너, 그때 울었잖아요.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지? 묻는다면 모른다고 답하리라. 나는 그가 덧붙일 말을 기다렸으나 그는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나를 지나쳐 걸었을 뿐이었다. 기다리라고는 하지 않았다.
언젠가 사라진다. 그러나 그건 세상의 모든 만물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만족을 얻으려 함은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주어진 게 없었다. 여신께서 빌려주신 것 뿐이었고, 온전히 스스로의 것이라 자부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주 기초적인 것마저도 여신의 것이었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의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고, 행복이라는 것이 무언지 알 수 없었다. 그럴 자격조차 얻지 못했다. 나는 진즉 그걸 깨닫고 있었는데, 그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알 것 같아요. 아주 조금은. 그는 내게 그리 말했다. 그가 웃은 것 역시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에서 읽힌 감정은 희열감 같은 게 아니었다. 눈도, 입도 웃고 있었으나 그만큼 강렬히 위화감을 느낀 적도 없었다. 무엇을? 그러나 굳이 묻지는 않았다. 대답을 바라고 내뱉은 말도 아니었을테다. 그것은 그저 청자를 무시한 말이었으리라. 나는 그저 다시 걸었다. 들리는 발소리는 하나뿐이었다.
땅에 그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 줄기가 흰 나무가 끝없이 자란 숲이었다. 언제 내렸는지도 모를 눈이 빠득빠득 밟혔다. 무상하게도 자란 가지들이 겹겹이 겹쳐 빽빽했다. 등 뒤에서 무언가 깨져나갔다. 돌아섰을 때 보이는 건 나무들 뿐이었다. 움직임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그래야, 했다. 그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무엇을 입고 있었는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머릿속에서 떠오르다가 무언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지워지고 있는 듯 했다.
나는 깨닫는다.
걸었다. 그저 걸었다. 보고 싶었던, 보고 싶지 않았던 모든 것들을 눈에 담으며 걸었다. 뜨거운 무언가를 밟기도 했고, 한없이 차가운 무언가를 밟기도 했다. 피부가 녹아내릴 정도로 뜨거웠다가, 질척댈 정도로 습했다가, 감각이 사라질 정도로 얼었다가, 쩍쩍 갈라질 정도로 건조했다가를 반복했다. 그동안 무언가에 몸을 싣기도 했고, 어딘가에 걸터앉아 있기도 했다. 오면서 들른 마을의 인간들은 한결같이 기뻐했다. 온 마을이 축제였고 온 인간들이 행복에 젖어 그리도 환한 웃음을 지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기쁘게들 웃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일부러 인적이 드문 지역을 위주로 걸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냥 누워 있다. 어떤 향도 올라오지 않는 곳에 그냥 누워만 있었다. 누구였더라. 누구였지? 분명 나와 너 말고 누군가가 더 있었다. 나보다 훨씬 더 빨리 거두어진 누군가. 그는 금방 거두어가시던데. 나는 그게 아닌가보지. 하늘은 검었다. 별 몇 점이 총총 박힌 밤하늘은 생각처럼 눈부셨다. 은하수가 놓인 하늘도 아름답지만 이 정도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다리가 말을 듣질 않았다.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어쩌면 여신께서는 내 힘을 앗아간 뒤에야 육신을 거두려 하시는 걸지도 모른다. 괜찮을까. 나는 잘 모른다. 인적이 좀체 없어보이는 곳이었다. 사람은 물론이고 아주 작디 작은 생물의 그림자초자 보이지 않는다. 괜찮을지도 모른다. 괜찮을 것이었다. 아무에게도 인식되지 않고 조용히 사위어가는 것이라면 괜찮을지도 몰랐다. 그래야만 했다.
너는 날 기억할까. 아니야, 아니다. 나는, 나와 너 이외에 누군가가 있긴 있었는데, 그가 누구였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있기는 했던가? 그 존재의 여부조차 확신할 수가 없다. 사실 나는 이제 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네가 명명하지 않은, 그러나 항상 반응은 하던 네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 이름은? 아인체이스 이스마엘. 내가 짓지 않은 내 이름은. 그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나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단어들을 네가 품고 있을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어떤 것을 막연히 그리는 것과 직접 눈앞에 두는 것은 다르다. 나는, 그것만은 진즉 알고 있었다.
의식이 흩어지는 것 같다. 후회는? 없었다. 괜찮다고 끊임없이 되뇌었다. 아니, 정말로 없었나. 없을 리가. 있었다. 있었다, 엘수색대는 어차피 날 잊는다. 나는 어차피 지워지기 마련이다. 지워진다, 나는 어차피 사랑을 바랄 수가 없는 위치에 있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에게 끝까지 미련을 남기지 않았다. 평소와는 다른 인사를, 그들에게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일상을, 남기고 왔다. 그들에게 미련은 없다. 그러나 너는? 너는, 난 네게 인사를 하지 못했다. 네게 다른 말을 남기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너를 마주하지 않았다. 널 찾아가지 않았다. 네게도 엘의 기운이 닿기는 닿았을 것이다. 내가 널 치유하기 위해 펼쳤던, 그 어떤 것 속에서 너는 괴로워했다. 너는 지금도 괴로워하고 있나? 나는, 난.
흐리던 시야가 깜빡깜빡 명멸한다.
마지막으로 그러쥔 끈을 놓기 직전이었다. 문득 위화감을 느꼈는데. 그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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