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에픽을 엘리시온까지만 알고 있습니다. 공식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시점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 밝은 내용은 아닙니다. 엄청 우울하지도 않고 그냥 음... 조금 찜찜할 정도로 가라앉은 느낌...? 입니다. 뭐라는거람.
※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나는 종종 울고 싶고는 했는데
[아포에브] mond
눈이 뜨인다. 찌푸려져 있던 미간을 풀어낸다. 빗물이 나뭇잎의 길을 타고 흘렀다. 눈 위로 물방울이 닿는다. 반사적으로 눈을 지끈 감는다. 고개를 숙이고 감은 눈 위를 손가락으로 몇 번인가 눌렀다. 아랑곳하지 않고 내려오는 빗방울은 어깨 위에 오르기도 했다. 성가셨다, 그러나 빗방울의 뜀박질 소리가 바로 귀 곁에서 들릴 정도였다.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도 똑같을 테다. 문득 바로 아래에서 다소 거친 소리가 났다. 흙 알갱이들이 긁혀나가는, 날카로운, 그리 날카롭지 않은 소리가 울렸다. 시선이 검은 손을 벗어난다. 내 머리카락보다는 아주 조금 더 밝은 머리카락이 잡힌다. 내려앉은 머리카락 아래로 다소 부산스러운 코트가 보였다. 검은 장갑 위로 새어 나온 손가락들이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헤집었다. 대강 정리한 듯한 모습이 낯익었다. 그는 주저앉는가 싶더니 제 코트 끝을 잡아 다시 일어섰다. 몇 번, 천이 크게 일렁이는 소리가 났다. 후유, 짧게 숨이 비치는 소리가 났다. 어디선가 비슷한 목소리를 들었던가. 가를 수는 없었다, 숨에 섞여나온 찰나의 음성은 정체를 확신하기에는 턱없이 짧았다. 문득 그의 고개가 오른다. 빗방울이 닿은 모양이었다. 눈이 마주친다. 아마도 볕 아래에 있었다면 보석처럼 맑게도 부서졌을 녹색 눈이었다. 그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간 눈을 크게 떴다. 웃었다, 길을 가던 우연히 친구를 본 어린아이가 저런 얼굴을 했었다.
"안녕?"
그는 맑게도 웃는다. 무어가 즐겁지? 나는 잘 몰랐다. 비가 온다, 누군가 파삭 젖은 채로 나무 그늘 밑에 들어온다. 빗속에 있으면 젖기 마련이다. 우산이 있는데도 펼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더군다나 들어와서 물기를 털었다, 비를 잠시 피하러 들어온 거겠지. 그런 결론에 이르기까지는 눈을 깜빡일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가지에 손을 짚고 내려온다. 그의 표정은 달라지지도 않았다.
"오랜만이죠?" "날 기억하나." "내가 어떻게 널 몰라요."
설마 나 못 알아보겠어요? 그는 덧붙였다.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다. 모른다고 말했을 때 그는 어떤 생각을 할지 나는 잘 몰랐다. 기억은,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에게도, 내게도 상당히 골치 아픈 것이었다. 굳이 대답해야 하는 말인가? 아니었다. 시선을 돌렸다.
"그래, 무슨 일이지." "앗, 내 말 무시하는 거예요? 쌀쌀맞게." "중요한가." "응, 많이요."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저를 감추는데 능해진 것 같다. 하기야 그때는 너나할 것 없이 어떤 혼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내가 그를 앎이 왜 중요하지? 그건 이해해야 하는 사항인가. 아니었다. 모든 이가 가치를 두는 것은 다르기 마련이었다. 줄기에 머리를 기대었다. 축축한 내가 코끝에 머물렀다.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엔파서." "와아, 이름이네요. 기뻐요."
그는 눈을 휘며까지 웃는다. 어느 면에서의 솔직함은 여전한 모양이다. 그는 내게서 아주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선 줄기에 등을 기대었다. 코트 끝을 잡아 제 앞에 끌어당긴 그는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져 앉았다. 등은 아프지 않은 건가.
"그냥, 길을 잃었네요." "길?" "갑자기 안개가 끼더라고요."
돌아가려고 했는데 길도 안 보이고… 헤매다 보니 비도 오고. 그런데 네가 있는 곳일 줄은 몰랐어요. 너는 다시 웃었다. 왜곡된 말이 귓가에서 소근거렸다. 눈을 지끈 감았다간 다시 뜬다. 옅은 소음이 빗소리 뒤에서 눈을 파랗게 뜨고 있었다.
"언제 돌아갈 참이지." "글쎄요."
그가 어떤 말을 하려고 한 것 같은데. 그러나 그는 곧 말을 삼켜버렸다. 비는 금방 그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온갖 소리들이 맴돌았다. 빗방울이 바닥에서 튀어 올라 발끝에 매달리기도 했다, 희미한 숨소리가 빗소리에 조각난다. 바람이 요란했다. 어느 정도 먹색에 물든 코트 자락이 검었다. 빗방울들은 떨어지면서도 그렇게나 할 말들이 많은지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거진 모든 소리가 짓눌려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방울 하나가 어깨에 떨어졌다.
"넌 여기에 머무르나요?"
문득 시선을 돌렸다. 그는 날 보고 있지는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려다 입을 열었다. 그래. 짧게만 대답한다. 옅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훌쩍 일어서더니 코트를 툭툭 털었다. 말을 붙이지 않는다. 그는 가볍게 돌아 날 바라봤다. 그의 신이 한 발짝 뒤로 옮는다. 그가 무어라 속삭이지 않았나. 빗소리가 말소리를 가둔다. 그는 금방 하얀 선들 너머로 사라져버린다. 중요한가? 아니. 머리를 나무에 기대었다. 줄기는 생각만큼이나 축축하고, 서늘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본래 숲은 정말이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작해야 내 옷의 천이 서로 맞부딪치는 소리, 내 머리카락이 천에 쓸리는 소리 정도였다. 생물은 거의 없고, 동물의 사체는 썩어버린 지 오래고, 나무마저도 거의 다 죽어버린 숲이었다. 날이 밝더라도 희뿌연 안개로 휩싸이는 숲. 그렇기에 인적은 찾아볼 수 없는 곳. 그런 곳에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낮과 밤은 어둡기로 구분했고 계절은 기온으로 구분했으나 깨지는 몸으론 언제부턴가 따뜻한, 차가운, 습한, 건조한, 그런, 것을 느낄 수 없었다. 무의미한 것뿐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말 그대로 어쩌다가 흘러들어 왔을 테다. 그는 참견을 좋아하진 않았으나, 유별나게도 걱정이 많았다. 그들은, 나는 필요하다면 아주 최소한의 수면을 청했다. 그 외에는 도무지 의식을 잃을 필요도, 일도 없었다. 다른 마을로 가게 된다면 그 주변은 반드시 눈에 익혀두는 것. 그의 습관이었다. 그는 잊을 즈음에 한 번씩 숲에 들어왔다. 다 타버린 검은 흙을 밟으며 내가 있는 곳을 찾았다. 애초에 기운을 읽는 그에게 나는 찾으려면 금방 찾을 수 있는 대상일 테다. 그는 주로 아무것도 없는 빈손을 흔들었지만 이따금 무언가를 들고 왔다. 그건 언젠가는 낯설 정도로 달아보이는 디저트이기도, 아주 붉은 고기이기도, 바짝 마른 어떤 것이기도, 아주 잘 구워진 빵이기도. 대개 먹는 것이었다. 그는, 나는, 무언가를 먹을 필요가 없었다. 먹어야 하는 이유는 없었으나 먹지 않아야 하는 이유 또한 없었다. 먹어서 오는 해는 없었고 먹지 않아서 오는 해 역시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 묻혀가는 순간들에 이따금 먹을 거리를 가지고 오곤 했다. 그는 언제나 제가 먹기도 전에 내게 처음을 권했으나 나는 늘 거절했다. 그는 몇 번은 그런대로 제가 가져온 걸 제가 다 먹었지만 언젠가부터는 내가 사양을 하든 말든 내 입에 음식을 갖다 대곤 했다. 마지못해 입안에 들여놓고 씹으면 그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런 일들에 그는 어딘가 즐거워 보이기도 했으나, 실제로 즐거웠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내가 여길 떠나면 어쩔 거지? 그런 말이 문득 목 아래서 끓었다. 의미 없는 문장들이 둥둥 떠다녔다. 지워내지 못할 말들은 죽여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미간에 무언가 닿았음을 깨닫기는 금방이었다. 곧게 뻗은 손 뒤로 그가 고개를 기울인 채 날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 해요?" "아무것도."
그의 손을 걷어낸다. 그는 밀린 제 손을 내려다보며 한 번 죄다간 떨어뜨렸다. 그럼 인상을 쓰질 않았겠죠. 그는 웃었다. 웃고 싶어서 웃는 건지, 웃어야 해서 웃는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에게 내가 얼굴을 움직이는 일은 대수로운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일어서더니 팔을 쭉 뻗었다. 그대로 부르르 떨다간 가볍게 통통 튀었다. 한쪽 어깨를 짚고 팔을 돌렸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봉투를 집어 곱게 접으며 그는 날 보며 배실 웃었다. 그는 언제부턴가 간다는 말을 웃음으로 대체하곤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는 그런 식으로 몇 번인가 오고 갔다.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았다.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그는 스쳐지나듯 그렇게 말했다. 무엇이? 그러나 나는 묻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가만히 날 보기만 했다.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흐린 시야를 깜빡였다. 문득 흙이 서벅이는 소리가 났다. 그의 실루엣이 어른거리다간 사라졌다. 어깨에 어떤 묵직한 것이 올라와 있었다. 허리에 무언가 감겨 있었다. 묻지는 않았다. 그의 팔이 그리도 세게 몸을 옭는다. 넌 여전히 차갑네요. 그가 웅얼거렸다.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금방 도로 떨어졌다.
"하하, 미안해요. 잠깐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서요."
그는 웃고 있었다. 그들은, 나는 본래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
"그럼 정말로 갈게요. 잘 지내야 해요." "그래."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그대로 돌아섰다.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저 멀리로 뛰어갔다.
숲은 다시 고요해진다. 원래 이랬다는 것처럼 잦아든다. 흙이 움직일 일은 없었다. 발자국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