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랍
12. 28
아 나도... 공연... 가고 싶어...
전부 드랍입니다. 길이는 들쭉날쭉합니다. 백업들과 중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순식간이었다.
네가 내 위로 떨어져내렸다. 우당탕, 시야가 뒤집히고 균형을 잃은 몸뚱아리가 바닥에 부딪쳤다. 아파. 말이 신음처럼 흘렀다. 그래, 아픈 건 나였다. 아파야 할 사람은 나였는데. 네가 곧 죽을 사람처럼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참동안 너는 그렇게 울었다. 내 뺨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일일이 닦아내며 한참을 내 위에서 흐느꼈다. 난 네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네 힘이 이렇게 강했던가. 그에 관련한 기억은 다른 기억들에 묻혀 꺼낼 수 없었다. 이내 너는 내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미안.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 너는 끝없이 중얼거렸다. 용서해줘요. 미워하지 말아요. 싫어요. 내게. 나를. 그런 말들을. 무언지 모르는 말엔 대답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걸 알고 있었다. 조용히 듣기만 했다. 붙잡힌 오른손이 저려올 때까지도. 어깨가 축축해질 즈음에도. 너는 비틀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네 눈은 젖어 있었다. 풀빛의 눈에 내가 비친다.
"너, 그거 알아요?"
버석하게 갈라져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 눈을 깜빡인다. 너는 또 다시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숨을 들이켰다. 풀썩 쓰러지듯 내 위에 엎드린다.
"너, 케이크에요."
나는 일주일을 굶주린 포크고.
웃지 말자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 다 웃어도 네 앞에서 웃지는 말자고. 이유는 잘 모른다. 그건 일종의 금기였다. 스스로에게 내건 족쇄였다. 왜 해야하는줄도 모르고 나는 그걸 거리낌없이 내 목에 채웠다. 내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너는 언제나 도처에 있었으므로 난 내 얼굴을 드러낼 일이 없었다. 내 얼굴 근육은 그대로 굳어갔다. 그나마 숨이라도 쉬는 건 입 근처와 눈 주변이었다. 그 외는 죽어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나는 재미없는 사람이 되었다. 아주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마냥 뛸 정도로 기쁘지도 않았다. 그저, 그렇구나. 하는 정도였다. 관심없는 친구의 근황을 듣는 정도의 반응. 저 먼 나라 어딘가의 어떤 사람이 오늘 생일이라는 둥의 얘기를 들은 기분. 그 정도였다.
매일매일은 변함없었다. 매일, 어느 정도 날이 새면 부스스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엘의 기운을 좇으며 마족에게 투영검을 수십 자루 찔러넣었고 흰 옷은 늘 검붉었다. 최대한 네가 없을 시기를 골랐지만 너는 항상 있었다. 그리고 웃었다. 왔어요.
안 죽었네. 징그럽게.
네 눈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니다. 아니야. 어느 순간부턴가 그런 생각들을 했다. 들었다는 표시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고개만 슬쩍 끄덕인다. 그러면 너는 그냥 웃으며 주변의 빛덩이를 내게 하나 날렸다. 노란빛이 주변을 감싸고 곳곳에 난 상처가 아문다. 너는 그냥 웃는다. 난 네 친절이 부담스러웠다. 나는 네게 빚을 지는 게 싫었다. 그래서 언제는 네 빛을 거부했다. 너는 그 이후로 내게 널 나누어주지 않았다. 다시는.
네가 내게 어떤 존재였는지 너는 영영 몰라도 된다. 네가 웃는 게 내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너는 영영 몰라도 된다. 네 목소리가 내게 어떻게 들리는지 너는 영영 몰라도 된다. 모든 고통은 나의 몫이고 너는 여전히 환한 빛에 둘러싸여 웃어도 된다. 나는 네가 스러지는 걸 바라지 않아.
네가 그렇게 흩어지는 걸 보고싶지 않아.
그렇게 결말의 순간에 사위는 걸 보려고 이제까지 널 베어내지 않은 건 아니었어.
그 시절이 지나가기 전에 너를, 단 한 번이라도 으스러지게 마주 껴안았어야 했는데. 그것이 결코 나를 해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끝내 무너지지도, 죽지도 않았을 텐데.
- 한강, 희랍어 시간
하늘이 썩 기분좋은 색은 아니다. 불이 내쉰 탁한 숨의 탓이다. 좋아하는 건 푸르고 흰 얼룩 위에 하얀, 붉은 점들이 흩어져 있는 모습이지만 그런 걸 바랄 때가 아니니 회색이 번진 감색으로 만족하는 수 밖에 없다. 딱 반으로 접힌 달이 이상하게도 낯설다. 공기는 그럭저럭 습하고 그럭저럭 차가웠다. 딱 웃옷 하나 걸치고 나오기 좋은 정도. 바람은 얼굴을 간지럽히며 머리를 살짝 흩뜨리고 지난다. 머리에 수시로 손이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다. 밤의 바람은 유독 장난기가 많아서다. 흙길이 나오고 나서야 들고 있던 뒷꿈치를 내려놓는다. 반쯤은 어쩔 수 없이 들고 있던 팔도 내려놓는다. 문득 눈이 부시다는 생각을 한다. 무심코 고개를 트니 나무들이 그치고 달이 보였다. 바닥에. 아니, 정확히는 수면에. 왜 아무도 여기에 호수가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 묻지 않아서 그런가. 틀어낸 발을 디딘다. 흙길이 나 있다는 건 사람이 자주 다녔다는 뜻이긴 한데. 시야를 가리던 나무들이 비켜난다. 별 생각없이 주변을 훑는다. 평범하게 발목까지 웃자란 풀들이 한들거린다.
문득 공기가 뒤틀린다. 바람이 비명을 내며 갈갈이 찢겨나간다. 당황을 삼키고 뒤를 돌아본다. 낯설고 익숙한 것. 칠흑보다도 더 검은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온다. 여신의 빛과는 다른 기운의 색이 불규칙한 직선을 그린다. 그는 그곳에서 살풋 빠져나온다. 고양이가 제 정강이까지 오는 어떤 것을 넘듯. 공간이 아물고 그 입구는 있지도 않았다는 것처럼 바뀐다. 그의 창백한 발이 바닥에 닿는다. 잔디가 갈색으로 변한다. 한쪽 발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선다. 아주 오래 전에 겪은, 아직도 남아있는 불길함이었다. 익숙하고 끔찍한 기운을 온몸에 뒤집어쓴 그는 그렇게 서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눈은 앞머리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도 그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자란 나무의 둥지 너머로 하얀 직선이 하나 사라지는 것을 봤다. 날 의식한 건 분명한데, 다른 반응이 없으니 영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그는 범인이 아닌 건 분명했으니. 그에게서 뻗어져나오는 기운에 속이 뒤틀릴 즈음이 되어서야 겨우 먼저 입을 열었다.
"저어."
그의 손 끝이 미세하게 꿈틀거린 걸 본다. 안녕.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서두는 보통 이렇게 꺼내던가. 가슴 안쪽에서 나비 몇 마리가 날아다니는 것 같다.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른다.
"너, 누구예요?"
우스운 질문이긴 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정의하는 건 어려운 법이다. 그건 단순하게는 이름으로 끝나기도 하지만 정체에 대한 의문이 되기도 하니. 눈을 한 번 깜빡일 정도의 침묵이 흐른다. 조용히 날숨을 뱉는다.
"…그럼 나 먼저 할게요. 난 아인체이스 이스마엘. 여신을 모시는 신관이고, 에브루헨 아모치온이라고도 해요. 너는?"
그의 빛바랜 입이 달싹이며 움직인다. 낮고 어딘가 갈라진 목소리가 흐른다. 아포스타시아. 그는 저를 그 한 단어로 설명한다.
"네게 해방을 안겨주러 왔어."
무슨. 말을 꺼내려 입을 열자 그의 손이 오르는 걸 본다. 공간이 불길한 색으로 뒤틀리는 걸 보며 반쯤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스친 소매가 검게 찢겨나갔다. 세상에. 숨을 삼키며 급히 아이트를 불러내었다. 처음 보는 게 아닌지 그는 놀라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 손에 그 자신보다도 더 큰 검은 낫이 쥐어진 걸 본다. 진심인가? 낫의 날이 바닥을 갈아내자 검은 파편이 튀어오른다. 다리를 움직여 옆으로 비켜났으나 다리가, 코트의 끝자락이 긁힌다. 찢긴 천자락으로 보인 상처는 붉다기보다는 검다. 그곳으로부터 불안이 벌레처럼 몸을 기어오른다. 설마. 하나의 가정이 피어오른다. 섣부른 판단은 독이다. 고개를 저어 생각을 내쫓는다.
"무얼 보는 거지?"
어느새 눈앞에 다가온 그의 속삭임에 발을 긋는다. 아이페. 순간적인 이동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하나쯤은 익혀두어 나쁠 게 없었다. 예를 들면 이럴 때에. 갑작스러웠을 충격에 그가 잠시 고개를 흔드는 사이 주변에 순환체가 하나 깃들었다. 그는 그저 눈을 한 번 흘긋 흘기고는 다시 날 바라본다. 그가 느리게 웃었다.
"잠깐, 잠깐만!"
기울던 몸이 멈춘다. 급하게 내뻗은 팔을 거두지는 않는다.
"좀 진정해요. 일단 말로 하자고요, 우리."
"…우리?"
"그으래요. 우리."
잠시 침묵하던 그의 손에서 낫이 사위어 바스러진다. 무언가 있기는 했냐는 듯 손이 떨어진다. 그는 처음과 같이 선다.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이걸. 묘하게 꿉꿉한 기분을 구석으로 몰아넣는다.
언제나 다칠 수 있다는 예상은 한다. 그러나 보통 라인으로 펼쳐낸 블루메로 치유하면 어느 정도의 치명상도 금방 회복되는 일이라 약물을 들고 다닐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설마 이런 상황에 놓일 줄은 몰랐지. 적의를 가진 상대와 이야기를 하려면 일단 내가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걸 알려야 했다. 내가 그럴 의도가 있든 없든, 상대에게 그렇게 비춰지면 그걸로 끝인 법이다. 그렇기에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슬슬 감각이 사라지는 다리도 어쩔 수 없었다. 새어나오는 숨을 삼킨다.
"내가 좀 묻고싶은 게 있는데요."
"무엇을."
"그냥, 이것저것."
아, 물론 너도 내게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봐도 되고요. 흐트러진 앞머리 아래에 드러난 눈이 바닥을 향하다 이내 오른다.
"내키는 대로 해."
"좀 길어질 거예요. 괜찮죠?"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적당히 느리게 발을 디딘다.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삐걱거렸다. 근섬유 하나하나에 얇은 가시가 촘촘이 들어차있는 기분. 입술을 짓씹었다.
! 호러? 고어? 요소가 있습니다. 다소 충격적일 수도 있으니 비위가 약하시거나/꺼리시는 분들은 주의해주세요.
묘사가 심한 편은 아닙니다.
아메에브 요소가 있습니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 싶었다
- 정호승, 철길에 앉아
목을 달았다. 그는 하나하나 정성스레 그곳에 하나씩 떨어져나간 목을 달아놓고 있었다. 그곳에? 허공을 그곳이라고 칭해도 되는가? 나는 모른다. 애초에 모든 것이 검은 공간에서 가구마저 검은색일지 아닐지 나는 모르는 탓이다. 그는 어느 중한 것을 만지는 듯 조심스런 손길로 아직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을 한번 쓸고 달아놓았다. 그렇게 몇 개째. 아마 처음 달렸을 목에서는 울음이 피어나고 있었다. 녹색의, 검푸른. 시선을 떼어놓는다. 막 새 목을 안은 그에게로.
"지겹지 않아요?"
그는 멈춘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내 눈엔 다 똑같은데, 그걸 왜 다 그렇게 띄워놔요. 가볍게 핀잔을 놓듯 중얼거린다. 그는 몸을 반쯤 돌려 날 마주한다. 배쯤까지 내려간 손 위에 내려앉은 목은 감긴 눈을 하고 있다.
"해 보겠어?"
"뭐라고요?"
알아듣지 못해서 꺼낸 반문이 아니었다. 진심도 아니었다, 그는 그 검은 목을 내게 내밀지 않았으니. 그는 고개를 살짝 한 번 끄덕이며 다시 몸을 돌렸다. 검보랏빛 손이 허공을 헤매었다.
"넌 지루하면 손을 움직이지."
까닥이던 손이 멈춘다. 그랬던가. 그랬는지도 모른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을 도로 폈다. 검은 머리카락이 공중에 붕 뜬다.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가볍게 헝클었다. 왜 이렇게 됐지?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지. 시작이 떠오르질 않는다. 시작이 생각나지 않으면 그건 꿈이라지. 그러나 이제까지 꿈이라는 건 막연히 인간이 하는 상상이라 여겼다. 내가 그럴 리가. 아니, 나는 그들에게서 감정을 배웠다. 꿈이라는 건 사람의 감정을 투영하지 않는가. 글쎄, 글쎄. 나는 잘 모른다. 그런 일은 영 관심이 없었으므로. 뒷덜미가 아리다.
문득 시야에 차 있던 그의 발이 내게로 돌려져 있음을 깨닫는다. 짓씹던 입술을 놓고 고개를 든다. 초점없는 암녹색 구슬 한 짝.
"네 시야 안의 모든 것들이 널 괴롭히면 차라리 눈을 감아."
"넌 정말 말을 돌려하는데 재능이 있는 것 같아요."
"누가 누구에게 해야 할 말을."
그는 앉는다. 어디에 앉았는지는 불분명하다. 그와 나, 또 그 무수한 목을 제하고는 모든 것이 칠흑인 괴이한 곳. 그런 곳에서 그만은 그 모든 게 익숙한 눈치였다. 나는? 그 어느 것도 익숙하지 않았다. 빛이 있다면 그림자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와 내게, 그 수없이 일렬로 늘어선 목들에게 지는 그림자는 분명히 빛이 있다는 걸 알려준다. 그러나 그 외의 모든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아주 검은색이라도 빛을 받으면 그림자는 생긴다. 아주 미묘하게라도. 그러나 이건.
눈을 지끈 감는다.
광원이 어딘지도 알 수 없는 그림자라니. 그런 건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다. 확실히 이 모든 것은 꿈이라야 가능한 일이다만 그럴 리도 없잖아. 아니, 아니. 글쎄. 어쩌면 여긴 그가 만들어낸 공간일 수도 있다. 나와 전혀 다른- 힘이라고 하기도 껄끄러운 어떤- 것을 쓸 그의 능력을 나는 아직 잘 몰랐다. 문득 머리카락에 무언가 닿아 고개를 든다. 바로 눈 앞에 재색 머리로 덮인 눈이 날 보고 있었다. 정말 숨조차 닿는 거리에.
그의 머리가 멀어진다. 삼킨 숨이 낯설었다.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머리들에 다시 숨이 막혔지만. 머리가 지끈거렸다, 누군가 뇌 속에서 망치질을 하고 있는 듯한. 서너명 정도가 뇌 속에서 철따위를 제련하는 듯한. 이제 그의 품은 비어 있었다.
"무엇이 널 두려움에 몰아넣었지."
"허, 내가요?"
"여기에 너 말고 누가 있어."
뭐가 있기는, 네가 달아놓은 목들이 있지. 그들의 혈색은 제각각이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구분도 되지 않을 정도로 혈색이 좋은 것부터, 그만큼이나 혈색이 좋지 않은 것까지. 공통점은, 금방이라도 감긴 눈을 떠 날 볼 것처럼 하나같이 다 부패된 곳이 없다는 점 정도다. 고개를 저었다. 이제 두통은 가셨나? 그렇긴 한데, 이젠 가슴이 아팠다. 누군가 없는 심장을 붙잡고 쥐어짜고 있는 것 같아. 피는 새어나오지 않는다. 대신 불쾌감이 잉크처럼 퍼질 뿐이다. 능청스레 웃는다.
"안 그래요, 나는."
그는 여전히 그저 날 보고만 있었다. 우두커니 서서 날 정면으로 보고만 있었다. 검은 팔이 공간에 스며 잘 보이지 않았다. 그의 가슴팍에 드러난 눈이 낯설고, 익숙했다. 그는 다시 몸을 돌렸다. 걸린 목에 손을 뻗은 그는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었다. 검붉은 머리카락이 그의 손 끝으로 흩어졌다.
"너무 겁먹지 마. 어차피 꿈이니."
"꿈? 어떻게 알아요."
그는 고개만을 돌려 날 본다.
"내가 정말 너와 한 공간에 있고 싶어할 것 같나?"
말을 하려 했다. 그러나 몸이 균형을 잃어 입은 다시 다물릴 수밖에 없었다. 견고했을 바닥이 갑자기 물컹하게 변했고 흔들렸다. 뜨여있던 그의 눈을 보지는 못했다. 그저 귀를, 눈 앞을 검정이 가득하게 채웠고, 문득 숨을 들이켜니 푸르게 물든 천장이 보였을 뿐이다. 그리 푹신하진 않은 매트리스가 침대 위라는 걸 알린다. 버스럭거리며 일어나면 조금은 거친 표면의 이불이 흘러내린다. 시야가 푸르다. 여명, 아직 동이 덜 튼 시각. 본디 좀 더 이르게 뜨였을 내 눈은 어째선지 조금 더 늦게 뜨였다. 땀이 나진 않았다. 당연할지도 모른다. 완전한 인간이 아닌, 흉내만을 내는 몸뚱이.
비가 오나. 투둑이는 소리가 난다. 지금이 몇 시지. 시계는 없었다. 톡톡 토독하고 빗방울이 간헐적으로 창문을 두드린다. 그 소리의 틈을 비집고 손기척 소리가 난다. 딱 귀에 거슬릴 정도의 크기로. 들어와도, 들어오지 않아도 괜찮아 반응하지 않는다. 두어 번, 그렇게 일정히 들리던 소리가 더는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달칵, 문이 열린다. 흰색 장갑이 보이고, 부시도록 하얗고 파란 그가 보인다. 그는 문손잡이를 잡은 채 거기에 서 있었다. 나는 그저 웃었다. 그의 미간이 움직이는 걸 봤다.
"방금 일어난 건가요."
"그런 모양이에요."
"무리했나보네요."
그의 말은 지나치게 함축적이어서, 내가 그의 말에 대답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아마 평소보다 늦은 시각이겠지. 그리고 밖엔 비가 오는 게 맞고.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잠시 창문을 본 그는 발을 들이고는 문을 등진 채 밀어 닫는다. 그는 군말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힘차고 망설임이 없도록 걷는다. 내게로 걸어오며 그는 오른손의 장갑을 빼었다. 아마도 손을 짚으려는 거겠지. 괜찮다고 말해야하나. 아주 잠깐 생각한다. 그러나 그 사이에 그는 장갑을 쥔 손으로 내 어깨를 잡아 틀었다. 그리곤 내 앞머리 아래에 손을 들이민다. 그의 체온은 낮은 편이다. 큰 의미가 없는 일이다. 입꼬리를 당긴다.
"걱정해주는 거예요?"
"그런 간지러운 단어가 내게 맞다고 생각해요?"
"하하, 차가워라."
내게서 떨어진 그는 손을 가볍게 한 번 털었다. 구겨진 장갑을 잡아당겨 편 그는 다시 오른손을 흰색으로 들여넣는다.
"말하는 걸 보니 내가 괜한 생각을 한 것 같네요."
"뭐였는데요?"
"네가 다친 걸 숨기기라도 한 것 같았어요."
"그게 걱정이잖아요."
"널 주어로 놓고 한 생각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야만 걱정인 건 아닐텐데. 그는 사소한 감정을 전부 억누르고 합리 위주로만 생각하다보니 가끔 미미한 감정에 대해서는 어긋난 판단을 내리곤 했다. 그걸 굳이 정정해봐야 그는 그게 뭐가 중요하냐는 눈으로 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이번에도 가장 좋은 선택은 말을 삼가는 거겠지. 나는 입을 다문다.
그는 감정을 버리진 않았다. 그저 저의, 내 목표를 위해 억누를 뿐이다. 나는 입을 열어 막 몸을 돌린 그를 불러세운다. 돌아보는 건 기대하지도 않는다. 멈춰주면 그것만으로 족하다.
"너, 꿈 꿔본 적 있어요?"
그는 천천히 돌아선다. 굳게 닫힌 입은 한 치도 움직이지 않는다. 부연설명을 기다리는 사람의 태도치고 언뜻 노려본다고 착각할 정도로 날카로운 눈초리였으나, 그게 가장 그다운 표현방법이었으므로 나는 다시 웃는다.
"인간이 잠들었을 때 종종 피어나곤 한다는 착각들 말예요."
헛웃는 소리가 났다. 그는 들어올린 팔을 얽어 제 몸 앞에 놓았다. 그의 고개가 기운다. 귀신이라도 봤나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리도 어처구니 없는 것이다. 허. 목 끝에서 낮은 웃음이 터진다.
"얘기가 왜 그렇게 튀어요?"
"악몽을 꿨나 싶어서."
"어떤 논리로 꿈의 여부를 묻는 행위가 귀신을 봤다는 결론에 다다르는지 모르겠네요, 너도 참… …."
말이 멈춘다. 예상한 반응은? 그런 걸 꿀 리가 없잖아요, 정도였다. 많이 가봤자, 왜, 꿈꿨어요? 하는 냉소를 기대했다. 그러나 정작 나온 말은 악몽에 관한 것. 그건 어느정도 인정한 모양새이지 않나. 올려다본 그는 날 보고 있었다. 내 눈은 아니었다, 이불을 쥐고 있을 내 손 언저리를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있어요?"
"네가 상상하는 그런 꿈은 아니에요."
눈을 가늘게 떴다.
"미안, 뭐라고요?"
"됐고, 움직이는데 불편이 없으면 일어나요."
그는 그런 식으로 자연스레 내 물음을 무시하곤 한다. 보통 그런 식으로 어물쩡 먹혀들어간 말의 답은 아무리 요구해도 주지 않았다. 깔끔하게 포기한다. 그는 이미 일찌감치 방을 나섰다. 남은 거라곤 미묘하게 들이차는 푸른 빛과 카페트에 남겨진 그의 발자국 정도다. 일어나기 싫네. 털썩,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가, 다시 벌떡 일어난다. 겨우 다리를 시트 밖으로 빼낸다. 차가워.
옷을 대충 갈아입고 내려온다. 머리는 대충 손으로 쓸어 정리한다. 그는, 아메 서머터지는 진즉 나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었을까. 아니, 없었으리라. 그는 홀로 전장에 나서는 대신 엘수색대- 사실 말이 그렇지 엘소드를 가장 중히 여겼다- 의 일은 내게 떠넘기듯 맡겼다. 다치는 것까진 어쩔 수 없어도 의식을 잃지는 않도록. 그 와중에 나도 신경쓸 것. 8명을 전부 서포트해가며 나까지 신경쓰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한숨은 물과 함께 삼켜낸다. 잔을 씻곤 도로 넣어놓는다. 입을 닦는다. 거실의 공기가 꽤 차다. 벽난로는 진즉 꺼졌는지 연기조차 피어오르지 않았다. 다가가 장작을 두어 개 집어넣고 곁 테이블에 놓여있던 성냥을 집어든다. 운 좋게도 한 번 긋는 것만으로 불이 생겨난다. 성냥을 벽난로 안에 집어던지면 곧 빨강이 피어오른다. 불그스름한 단풍으로부터, 주색, 이윽고 노랑, 하양이 생겨날 때까지. 그 과정을 조용히 보고만 있었다. 문득 뺨이 뜨겁다.
"어, 아인님?"
고개를 튼다. 청. 유독 건실하고 착실해 눈에 띄는 인간. 벌써 일어나신 거예요? 놀람이 묻어난 물음이 흐른다. 나는 입을 당겨 웃기만 할 뿐이다. 청이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가벼운 스트레칭. 이미 했다고 하기엔 눈에 잠기운이 어려있다. 물 마시러 왔나. 청이 차가운 물을 마셨던가? 보통은 미지근한 걸 마셨지. 위에 놓여있던 물병을 집어 던지는 시늉을 한다. 그가 화들짝 놀라며 자세를 취하고서야 물병을 던진다. 그 굵은 손에 물병이 들어앉는다. 그의 고개가 아주 조금 주억거렸다. 막 병의 주둥이를 쥔 그에게 말을 건네었다. 그렇죠 뭐. 너야말로 꽤 일찍 일어났네요. 잠자리가 사나웠나요?
"그냥, 눈이 빨리 떠졌네요."
빗소리 때문인가. 청은 멋쩍게 웃었다. 거짓말이군. 시선이 묘하게 비껴나간다. 아마 악몽이라도 꾼 거겠지, 최악의 경우 그의 아버지에 대한. 괜한 말로 심기를 거슬러 좋을 일이 없으니 입을 다문다. 목넘김 소리가 들릴 정도로 실내는 고요하다. 발을 틀어 몸의 방향을 바꾼다.
"단 게 마시고 싶네요. 네 것도 타줄까요?"
옅은 금발이 한들거린다. 아마 얼결에 한 긍정이다. 청이 단 걸 좋아했던가. 어린 아이는 대개 단 걸 좋아하는 법이지만 그건 대개일 뿐이다. 적당히 하기로 하자. 청을 스쳐지나 다시 부엌에 온다. 꺼낸 주전자에 물을 따른다. 대충 이 정도면 될까. 어둠은 편하면서도 불편한 것이라 이럴 때는 영 성가시다. 정중앙에 우유를 흘러넣다 하양이 더 이상 퍼지지 않으면 그만둔다. 제법 묵직해진 주전자를 들어올린다. 손잡이만 손가락 안쪽에 걸어놓은 잔들이 절겅거린다. 주전자를 난로 안쪽에 걸어놓고 잔에 초콜릿을 하나 둘 떨어뜨린다. 이미 앉아있는 그의 앞에 한 잔을 밀어놓는다. 형식적인 목례. 약 5분간 거의 세번째다. 내가 아직 불편한가? 그럴지도.
여명은 이제 어느정도 가셨다. 묘하게 어린 푸른 빛의 끝에 걸린 붉은 불이 장작을 삼키며 내는 소리가 썩 편안했다. 그렇다고 가신 잠이 다시 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무릎 위에 깍지를 껴 올려놓은 손가락을 끄떡거린다. 눈꺼풀을 내리고 고개를 젖힌다. 귀 바로 뒤에서 이명이 인다. 삐이이이이이이, 그 귀가 따끔거리도록 높은 소리를 톡 끊고 희미하게 물이 떨리는 소리가 나 반짝 눈을 뜬다. 아주 조금 밝아진 갈색 천장이 보인다. 목을 움직여 벽난로의 황색을 본다. 앞머리가 눈 끝을 찌른다.
"아인님."
"응, 왜요?"
굳이 눈을 마주할 필요는 없을테니 시선을 돌리진 않는다. 슬슬 데워졌기는 할텐데, 막 말을 꺼내는 사람을 눈 앞에 두고 일어나는 건 어쩌면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다는 뜻이 되곤 한다. 그러니 앉아만 있는다.
"혹시 어제 밤에, 노아 호 근처에 계셨나요?"
문득 실소가 올라오려 한다. 슬슬 어깻죽지가 당겼기에 고개를 돌려놓는다. 서머터지일까. 아무리 하멜이 흰색이라지만 그걸 제하더라도 머리가 눈에 띄니 조심해달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아뇨. 짧게 부정하곤 일어선다. 들어올린 두 손에서 왼손은 입을 꾹 누르고 오른손은 주전자를 빼낸다. 흘긋 본 청은 그렇냐는 듯 숨을 폭 내뱉고 있었다. 그의 잔에 먼저 따르니 불과 형식적인 목례를 네 번이나 받은 꼴이 되었다. 빈 주전자는 테이블의 가장자리에 놓는다. 스푼으로 휘저은 잔을 잠시 옆으로 밀어놓는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어제 입구에서 아인님같은 분을 뵈어서, 불렀는데… 대답 없이 가셨거든요."
잘못 본 게 아닐까요? 웃는다.
서머터지는 독선적이어서 엘수색대의 근처에 오는 일이 잘 없었다. 그가 하는 일은 수색대보다 좀 더 앞서나가 앞길을 조금 쓸고 오는- 그러니까 정찰과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소탕에 가까운 - 것 정도다. 앞에 있는 마족들의 성향따위를 알려주며 주의점을 알려주는 정도. 나와는 다른 감정을 겪은 그는 정이란 걸 느끼긴 하나 싶을 정도로 냉철해져버렸지만, 그만큼 너무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었으니. 잔을 다시 잡는다.
"보자마자 아인님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착각이었나봐요. 분위기가 좀 다르셨던 것 같아요."
잔의 표면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멎는다.
"어떻게요?"
"어제 본 분은 전체적으로, 음… 음울하셨으니까요."
음울하다. 그건 서머터지를 가리킬 표현이 아니었다. 신성하고, 각이 잡혀있거나, 유려하다는 둥 그런 아름다운 용어가 나올법했다. 그러나 음울이라니. 내게도, 그에게도 어울리지 않을 단어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치기로 한다. 괜한 말로 의구심을 품게 하는 건 뒷일이 영 복잡하게 엉키기 마련이다.
"그냥 머리색이 닮았던 거 아닐까요."
"그렇겠죠?"
"응. 코코아는 입에 맞아요?"
"아, 네. 맛있어요."
다행이네요. 웃는다. 손을 들어 잔을 입에 갖다댄다. 입 안에 흐르는 물은 적당히 달고, 썼다. 자리에서 일어났다간 장작을 하나 더 벽난로 안쪽에 던져넣는다. 난 이만 올라갈게요. 테이블 위에 놓아둔 잔을 잡아들었다. 청은 고개를 끄덕일 뿐 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오늘 식사는 누가 준비하기로 했더라. 시시콜콜한 생각을 한다. 움직일 때마다 입술 끝을 적시는 코코아가 여전히 뜨겁다. 계단은 삐걱이지 않는다.
꿈에서의 타인은 완벽한 타인이 아니다. 그의 일부다.
으흐흑 나나도 공연 가고 싶어...(파륻
봄이에요.
봄이요. 슬슬 날이 풀리고 있어요. 늘 뺨을 얼리고 지나던 바람도 슬슬 부드러워지는 봄.
잘 지내요?
난 잘 지내지 못하는데
*
사박, 신 아래의 홈으로 모래가 파고드는 소리가 난다. 사박, 사박, 사박. 굳이 바닥을 보며 걸을 이유도, 여유도 없어 고개를 움직이진 않는다. 읏차, 몸을 들썩여 안은 봉투를 조금 더 높게 든다. 시야가 조금 가려 삐뚜름하게 걷는다. 이거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참 민망할지도 모르겠다. 혼자 피식 웃는다. 파삭,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 문득 뒤를 살핀다. 낙엽이 밟혀 있었다. 낙엽? 아직도? 어지간히 사람이 다니지 않긴 하나 보다. 다시 걸음을 옮긴다. 나무들의 그늘에서 나오면 쨍한 해에 눈이 부셨다. 고개를 살레살레 젓곤 찌푸렸던 눈을 연다. 하얗게 든 물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푸른 잔상이 남는다. 파란색은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시푸르뎅뎅한 파란색은. 그래도 이곳에선 억지로 접해야 했지만. 모래바람에 건조한 눈을 비빌 수도 없다. 발 밑에서 물이 차박거린다. 슬슬 팔 안쪽에서 피가 구슬로 뭉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내려놓자니 발 밑이 물이었다. 봉투의 재질은 종이다.
주제문_당신을 생각하고 당신으로 인해 행복해지고 또 죽어가요
흰 숨이 바스라진다. 얼어 감각이 사라진 뺨은 그렇다치고 귀 끝이 참, 쩍쩍 갈라지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코트 주머니에 들여놓은 손이 아직 시렸다. 푹푹 꺼지는 발 밑에서 빠득빠득 눈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시야 끝으로 간간히 보이는 그의 발은, 창백하면서 붉게 질려 오히려 더 안쓰러웠다.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은 눈치였지만. 발이 차가웠다, 신발 안쪽으로 눈이 녹은 물이 스미는걸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발을 낼 때마다 눈결정이 하나하나 튀어오른다. 그는 멈추지도 않았고, 입을 열지도 않았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이라도 하면 좀 웃기긴 하겠다. 침묵은 생각보다 성가시고, 귀찮은 만큼이나 편하다. 그의 그러한 반응에 나는 따라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무시일까, 말을 고르는 걸까. 전자겠지. 코 안쪽이 영 따끔거렸다.
"하길 바라나?"
응? 걸음이 순간 주춤한다. 물론 그는 아랑곳않고 걷는다. 눈길에서 급하게 걷기는 싫은데. 총총 뛰어 다시 곁으로 선다.
"내가요?"
그가 곁눈으로 날 본 것 같았다. 그는 그저 고개를 아주 살짝 끄떡였을 뿐이다. 허. 낮게 헛웃었다.
"그런 건 아니었는데."
그는 별 다른 말을 붙이진 않는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사실이다. 그러나 그걸 굳이 이런 식으로 확인하고 싶진 않았다. 특히나 그에게는 더욱. 그의 얼굴은 텅 비어 이제 의사를 전하는 말만 전할 따름이다. 날숨은 삼키고 입술을 짓씹는다. 각질이 일어났는지 껍질이 뜯겨 씹힌다. 한쪽이 따가웠다.
"너도 적막에는 익숙할텐데."
"익숙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있는 정적만큼 어색한 건 없다구요. 그것도 둘이서."
"안타깝게 됐군."
눈이 검게 가라앉는다. 이렇게나 담백한 부정은 또 오랜만에 듣는다. 괜히 웃음이 샌다. 별 말을 할 생각은 들지 않는다. 끓어오르는 활자들이 쉼없이 바글거린다. 다만 그뿐이다. 가라앉마 밖으로 새어야만 하는 말은 없었다. 입에 지퍼를 다는 일은 어렵지 않다. 아마도, 아마도.
네가 웃었다. 너는 항상 웃었다. 네 얼굴에서 웃음기가 아예 싹 가신 걸 본 기억은 흐리다. 기억도 나지 않는 아득한 날들에 드문드문 섞여있었던 것 같은. 너는 그만큼 헤프게 웃었고, 네 웃음은 어쩌면 흔한 것이었고 어쩌면 실로 드문 것이었다. 네 눈이 웃지 않더라도 네 입은 늘 올라가 있던 것 같다.
나는 검정에 익숙하진 않다. 그건 아득히 먼, 그러나 바로 엊그제의 일인 듯 생생히 다가오는 공간의 색인 탓이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러나 선명히 흉터로 새겨져버린 기억이 존재하는 탓이다. 악몽보다도 더 깊고 절망보다 더 검은 어떠한 공간이 흔적으로 남아버린 탓이다. 검정은 꼭 그를 마주하는 듯해. 좋아하는 색은 아니었고, 밤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는 네가 싫어야 했는데. 그래야만 하는데.
*
... 일어나 앉는다. 창에 여 보란 듯이 실루엣이 비친다. 피식 웃음이 터진다. 침대에서 내려오면 닿는 바닥이 차가웠다. 뻗은 손에 닿는 창틀 역시 차갑다. 인영이 조금 커지며 흐릿해진다. 잠금쇠를 돌려 빼내고, 문을 연다. 안녕. 생각만큼 멀리 있는 그에게 부러 속삭였다.
그가 반응하는 일은 드물다. 금방 사라지거나 그대로 어딘가로 날아가거나, 둘 중 하나다.
네가 사라진 지 며칠이 흘렀지. 나는 잘 모른다. 단지 네가 생각나는 시기가 왔다는 것만을 알아차릴 뿐이다. 언제나 가라앉은 눈을 하고 있던 네 곁에서 나던 향이 콧망울에 닿는다. 인사가 닿지 않을 것을 안다. 열려 있던 창문 틈을 비집고 빗물이 뛰쳐들어온다. 손가락으로 쓸어낸 빗물이 뭉개져버린다. 뭉쳐있는 물을 가만히 보다간 손을 털어낸다. 물이 완전히 떨어져나갈 리도 없기에 옷에 대충 문질러 닦아버린다. 그래도 손의 꺼림칙한 느낌이 완전히 가시는 건 아니지만. 내려놨던 잔을 다시 집어든다. 미지근하다 못해 차가워진 코코아를 머금는다. 첫맛은 달고, 끝맛은 아주 조금 쓰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그런 느낌인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초콜릿은 첫맛이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하다. 보통 쓰이는 갈색의, 카카오가 들어가는 초콜릿은 끝맛은 쓸 수밖에 없다. 카카오가 본래 쓴 맛을 내는 탓이다. 그렇기에 쓴맛이 날 수밖에 없는데.
미문으로 끝내는 거 너무 좋아하네
그는 언제나 이어폰을 끼고 있다. 대개 창 밖을 보며 손을 까닥이거나, 눈을 감고 있거나 둘 중 하나다. 그의 안색은 언제나 창백했고, 늘 손목 아래로 내려오는 소매를 입고 있으면서 늘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있다가 문득 깜빡이며 창 밖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버스의 부저를 누르고 자리를 뜨곤 했다. 아마 자고 있던 것 같았지만, 그는 어떻게든 잘도 깨어났다. 분명 음악소리가 이어폰을 새고 나올 정도로 컸는데.
그의 눈에는 아마도 내가 익지는 않았을테다. 눈이 마주친 적이 없다는 것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
! 아메에브 요소가 있습니다.
시야가 데구르르 구른다. 발이 닿은 곳이 바닥인지 천장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하얀 스파크가 눈 앞에서 일다간 검은 공기방울이 톡 톡 터져나간다. 목 저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숨에 입 안이 바작바작 마른다. 타액이 기분나쁘게 손등에 얽힌다. 삼킨 숨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애써 시야를 붙잡으려 눈을 지끈 감는다. 눈물로 흐린 시야 너머로 붉은, 흰 꽃잎이 보였다. 꼭 눈밭의 피를 보는 듯한 착각이 인다. 하얗게 쌓여나간 꽃잎과 점점이 흩어진 붉은 잎들이. 하. 헛웃음이 샌다. 겨우 벽을 다시 짚는다. 후들거리며 힘이 빠지는 다리에 겨우 체중을 실으며 등을 벽에 짚는다. 꽃잎더미 바로 곁에 주저앉는다. 손 끝에 닿은 꽃잎은 아직 축축하다. 손으로 감싼 얼굴이 뜨거웠다. 눈이 아프다.
멎은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올라온다. 숨이 다시 올라온다. 먹은 숨이, 꽃잎이 함께 입 안을 벗어난다.
지겨운 일들이다.
*
발소리가 난다. 낮고, 일정히, 빠르게. 커지던 소리가 가까이에서 멎는다. 고개를 들 생각은 들었으나, 어째 목이 움직이질 않았다. 일말의 배려였는지, 옅은 한숨소리가 들렸다. 에브루헨. 낮게 깔리는 목소리에도 손가락만 꿈찔할 뿐 목에 힘이 없는 건 여전했다. 천자락이 서로 맞닿아 스치는 소리가 났다. 머리카락 사이로 곧은 무언가가 덩굴처럼 얽혀들어온다. 그것들은 아마도 손가락이다. 그는 생각보다 악력 자체는 강한 탓에 누군가의 힘없는 머리를 올리는 일쯤은 쉽게 해낸다. 여전히 건조하고 흐릿한 눈동자에 내가 비치는 일은 없다. 웃는다. 목소리가 갈라진다.
"안녕."
"설득력이 없으니 적당히 웃어요."
푸흐흐 웃는다. 곧은 손가락이 빠져나가더라도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는 고개는 팔에 기댄다. 그는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의 끝을 잡아 빼낸다. 헛기침도 나오지 않아 마른 침만 한 번 삼킨다.
"정리는 내가 해도 괜찮아요."
"할 수 있었다면 진즉 했겠죠."
다른 말을 해봤자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것을 알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벗겨낸 장갑을 아무런 미련 없이 바닥에 떨어뜨리고 몸을 옆으로 튼다. 망설임 없는 손 끝으로, 곁으로 꽃잎들이 하나둘씩 쓸려온다. 괜찮은데. 정말 괜찮은데. 그러나 손가락만 움찔하고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눈알만 뒤룩뒤룩 굴리며 그가 하는 걸 보고만 있었다. 그가 꽃잎들을 그러모으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저벅이며 걸어나간 그는 어딘가의 통에 꽃잎을 털어넣는다. 하늘하늘 떨어져내리는 꽃잎은 파티 후의 종이조각이나 다름없다. 다시 곁에 다가오나 싶었던 그는 아까 내려놓은 장갑을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통에 던져넣어버린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몸을 튼 그는 벌컥 창문을 연다. 그러고보니 빗소리가 들린다. 그는 창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아주, 쭉.
"오늘은 또 언제부터 그랬나요?"
"글쎄, 그 아이들이 저녁을 먹자고 할 즈음일 거예요."
"같이 하진 않았고요?"
"그렇죠."
가볍게 물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손뼉이라도 쳤나. 창을 다시 닫은 그는 주변을 휘 둘러보다 그저 손을 떨어뜨렸다. 그러고보니 코트 끝자락이 꽤 젖어 있다. 비가 오는 게 맞긴 한 모양이다.
"…언제 돌아올 참인가요?"
"잘 모르겠는걸요."
웃는다. 그는 미간을 찡그리다간 몸을 틀며 가볍게 혀를 찼을 뿐이다. 그는 이제 그저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정도로만 그친다. 서로에게 피곤하지 않을 선을 지키는 건 서로에게 이득인 탓이다. 편치 않은 구석마저도 짧고 불안정한 평화를 위해 저 구석으로 밀어놓는 게 그와 내 암묵적인 규칙이 되어버린 탓이다. 그래도 빨리 돌아오게 해볼게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예상을 했는지도 모른다. 비가 오는 날엔 꼭 떠오르는 탓이었다. 꼭, 비의 습하고, 흐린 향을 온 몸에 두르고 점차 모든 것을 잃어갔던 그가 떠오르는 탓이었다. 괜찮아요, 금방 나아질 거예요. 퍽이나. 자기암시도 정도껏이지. 일어나서 무언가를 하긴 해야하는데,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데구르르, 눈이 다시 한 번 구른다. 창을 토닥토닥 두드리는 빗줄기의 발소리 사이로 무언가 끓는 소리가 닿는다. 착각인지도 모른다. 슬슬 고개를 다시 떨어뜨려도 괜찮을까, 싶다가도 다시 떨어뜨렸다가 일으키지 않으면 어쩌나, 싶어진다. 시야의 반은 내 팔로 가려져 있었다. 별 의미가 없는 일이다.
눈을 감는다. 애초에 그에게, 내게, 우리에게 수면은 큰 의미가 없다. 인간의 흉내를 내는 것 뿐이다. 잠을 청하는 행위 역시 그리 쓸모있는 일은 아니다. 수마는 찾아오지 않는다. 대신 다시 발소리가 가까워질 뿐이다. 곁에 누군가 앉은 것 같았다. 무언가 가벼우나 단단한 것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일어나요."
"일으켜주면 안 될까요?"
"응석은 충분히 받아준 것 같은데."
"하하."
천천히 손에 힘을 준다. 조금씩, 굳은 신경들을 움직인다. 손가락에 힘을 주는 것부터. 그 이후부터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몸이 움직인다. 단지 처음 움직일 때가 말도 안되게 힘들 뿐이지. 그는 그 모든 것을 그 사늘한 눈으로 보고 있을 따름이다. 달그락, 났던 소리가 한 번 더 난다. 그는 내게 잔을 하나 내밀고 있었다. 하얗게 김이 이는 희고 불투명한 물. 고소한 내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일단은 받아든다. 우유? 눈을 깜빡인다. 웅크렸던 다리를 펴놓는다. 다리 안쪽이 알알하다.
"할 말이라도."
"웬 일이에요?"
"뭐가요."
"이거요."
"빨리 정신 차리라는 뜻 외에 또 뭐가 있겠어요."
그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잔을 입에 갖다댄다. 친절하네요, 라고 했다간 잔을 깨고 검을 내 목에 들이밀까. 그런 위협은 우리에게 별다른 해를 끼치지 못하지만, 그런 부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좋은 반응이 올 리는 없으니 그저 입을 다문다. 흘려넣은 우유를 넘기면 온기가 전신에 퍼진다. 나른하진 않다.
"내일은 어떨 것 같아요?"
"크게 눈에 띄는 놈은 없어요."
"평소대로 가도 된다고요?"
"조금 날을 세워요."
웃는다. 알았어요. 잡은 머그잔이 따뜻하다. 당연하지만. 그의 손가락이 가볍게 까닥인다. 그는 무언가 석연찮을 때마다 그런 식으로 무언가를 두드리곤 했다.
"할 말 있죠."
"아주 많이요."
"왜 안 해요?"
"어차피 안 들릴 것 같아서."
고개가 기운다.
"말은 하기 전엔 몰라요."
"아니, 정정할게요."
수십번 했는데, 네가 듣지 않았죠. 그는 아무렇지 않게 덧붙인다.
쾅, 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나지 않았던가? 나는 잘 모른다. 관절이 삐걱거리지 않나. 생각할 틈같은 게 생기질 않는다. 애초에 근본이 같다는 건 너무나 성가시다. 어지러운 머리를 추스른다. 너를 어떻게 해야하지? 너는 낫이 채 바스라지기도 전에 아무런 망설임없이 손에서 놔버린다. 검은 불들이 일어난다. 네가 순간으로 이동하는 일에는 익숙하다. 당연한 탓이다.
너도 그렇겠지.
네 옷은 붙잡을 구석이 없다. 너는 옷을 걸쳤다기보다, 쓰고 있었다. 덕에 나는 네게 직접 닿는 수밖에 없다. 네 목에 닿은 손 끝으로 벌레가 수십, 수천마리가 오르는 것만 같다. 너를 넘어뜨려도 넌 당연스레 날 부술까. 그럴 것이다. 의미가 없는 일이다. 네 말마따나.
네가 바닥에 부딪친 것 같은데. 내 팔도 바닥에 갈린 것 같은데. 아주, 따가웠다. 하지만 상관없지않을까. 네 손이 내 머리에 닿아 내 머리가 터져나가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어차피 사라져.
그만할까요, 이제. 나는 지쳤는데.
네게 말이 닿을 일은 없다. 나는 널 끌어안고 있을 따름이다. 아주 가까이에서 혼돈의 내가 아주 짙게 난다. 코가, 뇌가 마비될 정도로. 숨은 삼키지 않는다. 귓가에서 옅은 웃음소리가 터져나온다.
"돌아갈텐가."
"그건 사양하고 싶은데요."
"고통은 없을 거다."
"네 아픔이랑 내 아픔의 턱은 다르잖아요."
내장 속에서부터 가시가 돋아나는 착각이 인다. 등에 무언가 얹힌다. 아마도 네 손이다. 불안이 고개를 들고 날 쳐다봤다.
괜찮아. 네가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뭔데 이렇게 자꾸 쓰다말다를 했을까...
후두둑. 철퍽, 그런 소리가 난다. 고개를 돌린다. 그는 이제 완전히 벌겋게 변해버린 제 팔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눈치였다. 죔으로 꿈틀거리는 근육들이 영 낯설어 속이 이상했다. 누군가 속을 한 번 큰 장대로 저은 듯한 울렁거림. 그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그는 걷은 소매를 재빨리 내리고 주머니에 제 손을 쑤셔넣었다. 관자놀이에 손을 짚어 꾹 누른다.
"미안해요."
"뭐가."
"그냥."
그는 할 말이 있는 눈치였으나 입을 다물었다. 대신 등을 돌렸을 뿐이다. 나로서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왜 굳이 나를 돌보고 있는가부터 시작해 왜 그렇게까지 날 신경써주는지에 대해. 먹으려고? 그러면 진작에 먹었어야했다, 어릴 수록 살점이 여린 건 사람이라고 다르진 않을테다. 누군가의 부탁으로? 애초에 난 이 곳에 내어진 순간부터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지않나? 뭐가 문제지, 뭐가.
어깨에 무언가 닿은 것 같았다. 무심코 돌아보니 그가 있었다. 목의 절반 이상은 붕대따위로 친친 감아올리고 이미 녹아내리기 시작했을 왼쪽 뺨에도 거즈를 붙인. 왜 그렇게까지 해요? 묻고 싶었으나,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에는 검은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배는."
"아직 안 고파요."
"밖은."
"안 나가도 돼요."
그럼 그는 눈을 가늘게 뜬다. 여기서 눈을 돌리면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 꼴이 되나. 눈을 피하지 않는다. 그의 눈은 언제 봐도 흐리멍덩하고 초점이 없었다. 사람의 눈이라기에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눈이었다. 실제로 사람이었던 존재일지라도. 모든 이들이 그랬다. 그가 먼저 고개를 돌린다. 그가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검은 코트가 조용히 오르내리는 걸 보고 있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땅에 짚으며 쪼그려 앉는다. 그의 그런 태도는 대개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불편하다. 그러나 눈을 찡그리진 않는다. 나는 그걸 멀뚱히 보다간 따라 앉는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이를 내려다보는 것만큼 불편한 일은 없는 탓이다. 그는 이제 익숙해진 것 같다.
"…말해."
"네?"
"내 무엇이 문제지. 미안하지만, 나는 말하지 않으면 몰라."
뭐가. 당신이 문제라 여길만한 구석이 어디에 있지? 문제는 내게 있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는거지. 수십 마디의 말이 떠올랐다가 도로 가라앉는다. 하. 얕은 웃음이 샌다.
"난 당신이 불편한 게 아니에요."
그의 눈이 움찔한 듯한 착각이 인다.
"왜 미안하다고 하나."
"미안해서요."
"이유도 모르고 사과받는 건 오히려 불쾌해."
"그것까지 포함해서요."
그는 미간을 노골적으로 일그러뜨린다. 검은 손이 오른다. 그가 진심으로 내게 해를 가하진 않는다. 대개 머리를 헝클거나, 이마에 가벼운 딱밤을 놓거나, 이마를 살짝 밀거나… 어깨를 툭 치거나. 대개 그런 일이다. 머리 위에 손이 놓인다.
"그냥은 없어. 털어놓기 껄끄러운 일인가?"
"정말 별 이유 없어요."
"말했을텐데. 거짓말을 하려면 철저하게 하라고."
눈을 피하지는 않는다. 머리카락 탓인지 장갑 탓인지, 혹은 둘 다인지 온기도 한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서 인상 펴라고 미간을 누르면 혼나겠지. 가만히 있는다. 그의 손이 미끄러진다. 그의 손가락들이 머리카락 사이를 빠져나간다. 그의 낯에서 일그러짐이 가신 것 같다. 고개를 조금 숙인다.
"난 널 먹지 않아. 먹히게 두지도 않을 거고."
머리카락을 쓸고 내려오던 손이 뺨 언저리에서 멎는다. 맞잡은 손이 차다.
언젠가 너를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언제? 문제는 그걸 모른다는 것이다. 분명 어디선가 만났는데. 일어나는 기시감은 의문만 불러 일으킬 뿐이다. 너는 생각하는 모습을 싫어했기에 오래 앓진 않는다. 너는 내 기색이 이상하면 달려와서 괜찮느냐고 묻곤 했던 탓이다. 지금처럼.
어느새 시야 안으로 젖은 발이 보인다. 바짓자락이 머금은 물을 한방울씩 토해낸다. 고개를 들면 네가 등진 해에 눈이 부셔 제대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손을 들어 네 뒤의 해를 가리려 하면 네가 먼저 손을 뻗어온다. 머리카락 사이로 젖은, 차가운 손이 닿는다. 너는 모든 것을 손으로, 눈으로 말한 탓이다. 차갑게 내려앉은 네 머리카락이 이마에 닿는다. 깜빡, 눈 앞에서 흐린 눈이 움직인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은 대충 짐작이 간다. 무슨 일 있어요, 부터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와 같은 무엇이다. 물기어린 네 손이 닿은 뺨이, 손가락 끝이 닿은 목덜미가 간지럽다. 네 어깨를 짚고 너를 살짝 밀어낸다. 고개를 가볍게 젓는다. 네 등 뒤로 돋아나는 해에 다시 눈이 부시자 너는 털썩 주저앉는다. 어디든 푹푹 앉고 어디든 픽픽 눕는 건 네가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였다. 소매를 당겨 네 머리카락을 가볍게 누른다. 머리 위에 물음표를 그리던 너는 까르르 웃으며 내 손을 밀어냈다.
괜찮아요.
네가 그렇게 말하려고 한 것 같다. 너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가 손으로 가볍게 머리를 털었다. 내려앉던 머리카락들이 다시 하나둘 일어났지만 그 끝에 물방울이 끝임없이 다롱다롱 매달린다. 네가 아플 일이 절대로 없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건 일종의 본능과 비슷한 무엇이다. 굳이 정의하자면 안쓰러움에 가까운 어떤 것. 너는 무언가 문제라도 있느냐고 묻는듯 갸우뚱거린다. 나는 괸 턱을 떨어뜨리지는 않고 고개를 젓는다. 네 손이 다가와 시야를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버린다. 그리고는 웃는다. 어차피 다시 내려와버릴텐데. 넌 참 헤프게도 웃는다. 네 턱 끝에 매달려있던 물이 방울로 똑 떨어져내린다. 바람이 미지근하다.
앉아있던 너는 조만간 다시 일어선다. 굳이 시선을 일으키진 않는다. 너는 내 팔을 잡아 아주 조금 당기다 만다. 내가 균형을 잃지는 않고, 그저 어깨가 조금 기울었다 말 정도로만. 네 다른 손이 계곡을 가리키는 것을 본다. 같이 가요, 같이 놀아요. 그런 말들이다. 여기서 괜찮다고 하면 너는 풀이 죽을까. 옷이 무거워지는 건 질색이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네 낯이 환해지는 걸 본다. 어딘가가 쿡쿡 무딘 바늘로 찔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발만이라도 괜찮다면."
너는 눈을 깜빡인다. 스르륵 떨어지던 네 눈이 다시 내 얼굴까지 올라온다. 전신이 눈길로 훑어지는 건 썩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너는 알겠다는 듯 환히 웃고는 종종거리며 걸었다. 네 발이 차박차박 기분좋은 소리를 낸다. 물로 걸어들어가는 너는 내 팔을 놓는다. 그리고는 나뭇가지에서 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아주 당연하게 내려앉는다. 이제 별로 놀랍지도 않다. 쪼그려앉아 아직 거품이 이는 자리를 보고 있으니 곧 네가 떠오른다. 얼굴을 쓸어올린 너는 날 쳐다보다간 갸웃거린다. 뺨에 바람을 채웠다가 도로 피시식 뱉어내며 웃는다.
이제 안 놀라네요.
너는 그렇게 말한 것 같다. 그런대로 고개를 끄덕인다. 벗은 신을 곁에 놓고 발목의 매듭을 풀어낸다. 자락을 걷어내고 뻗은 발을 수면에 놓자 수면이 얕게 일렁인다. 흐린 파동은 네 움직임으로 피어난 동그라미들에 부딪혀 사라져버린다. 아직은 차가운 물 속에서 너는 참 잘도 움직인다. 어린 아이같다. 너는 언제나 처음 와본 아이처럼 밝게 웃었다.
검은, 푸른 물 밑에서 돌멩이가 알알이 움직인다. 네 발이 달강거리며 돌 사이를 헤집는 걸 본다.
어느샌가 곁에 네가 동실동실 떠올라있다. 배 위에 가볍게 깍지낀 손을 놓고, 고개만 살짝 젖혀 말똥히 깡빡깜빡. 네 눈 위에 흰 동그라미가 알알이 박힌다. 네 길고 곧은 손에 매달리던 물방울들이 까르르 웃으며 흘러내린다. 잠깐, 넌 방금 손가락을 서로 퉁겨낸 것 같은...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간다. 너는 키득키득 웃는다. 너는 한번 더 그런 일을 하지는 않는다. 심술같은 건 나지도 않았다. 네가 하는 일들에 비하면 장난의 축에도 끼지 않은 탓이다. 소매를 걷어 뻗은 손으로 네 앞머리를 쓸어 넘긴다. 너는 지끈 눈을 감는가 싶더니 토끼눈을 하고 깜빡깜빡 날 쳐다본다. 나는 다른 말을 하지는 않는다. 네 고개가 아주 약간 기운 것 같았다. 네 머리칼이 수면 아래서 흔들렸다. 너는 곧 다시 웃는다. 네 눈이 움직이는 모습은 낯설고, 그렇게나 익숙했다. 나는 안 그래도 없는 말을 곧잘 삼켰고 너는 웃기만 했다. 볕이 따갑다는 생각을 한다. 너는 발을 움직여 가에 팔을 얹어 네 스스로를 뒤집어놓는다. 네 머리는 결국 털어낸 의미가 없도록 다시 포옥 내려앉아버린다. 너는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웃고만 있다. 그림자의 길이는, 짧아지지 않았나.
짧아졌어.
"미안하지만, 난 이제 가야 해."
네 얼굴이 순식간에 굳는다. 입꼬리가 내리고 눈웃음이 사라진다. 그러나 그 얼굴은 눈을 깜빡이는 사이 사라진다. 너는 표정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태연하고 능했기에. 너는 이제 막 뭍에 발을 디디는 참이다.
"오늘은 일이 있어."
너는 여전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바짓단의 매듭을 다시 지어 신에 발을 꿰차넣는다. 네 웃음이 조금 더 선명해진 것 같다. 넌 기분이 나쁜 걸 웃어 감추곤 했다.
머리가 아프다.
실은, 너를 마주하기도 전, 아주 오랜 순간부터. 네게서 느껴지는 것들이, 네 등 뒤의 갈라진 공간에서 자라나는 말들이 쉼없이 귓가를 두드렸다. 그 셀수도 없이 많은 말들은 뭉개지고 일그러져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지도 못한다. 누군가 아주 큰 장대를 들고 두개골 안을 들쑤시는 느낌이 든다. 꾹 감은 눈꺼풀 사이로 열기가 오른다. 목에 불쾌한 가시가 돋아나있는 기분이 든다. 즐거울 리가 없어.
너는 이보다 더한 것들을 느끼고 있나? 나는 모른다. 끔찍하다, 는 단어조차 그 느낌을 표현하기에 너무나 가볍게 느껴질 정도의 공간이 내게 큰 흉을 남기고 지났다. 그러나 너는 그것에 영영 붙잡혀있다. 너는 편안한 얼굴을 한다, 실은 편안한지 아닌지도 모른다. 네가 무사할 리가 없다. 어떻게든 그곳에 있을지는 몰라도, 잘 지낼 리가 없다. 그런 것에 째로 삼켜져서 괜찮을 리가 없다고, 나는 믿었는데.
"에브루헨."
네 목소리가 난다. 말꼬리가, 올라가는지 툭 떨어지는지조차 구분하기 힘들다. 한탄에 가까운 것을 어떻게든 소리로 바꾼 듯한. 손끝으로 벌레가 오르는 것 같았다. 손 끝으로부터, 팔, 어깨, 목까지. 손을 들어 목을 긁는다. 뭐라고 해야하지? 안녕? 퍽이나. 오랜만이에요? 새삼스러운 말이다, 반가워요? 그건 가식이 아닌가? 아니, 애초에 내가 행하는 행동 전부가 가식이지 않았나, 뭐가 목 끝에 걸려 넘어오지 않는거지. 생각의 끝자락에 걸린 말이 도저히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손가락을 입에 넣으면 나오나? 아니, 아니야. 고개를 젓지는 않는다. 너는 보이지 않는다.
"놀랐어요?"
대답은 바로 들리지 않는다. 바로 뒤에서 혼란의 손이 몸을 훑는다. 고개를 돌렸으나 보이는 건 없었다. 문득 시야 일부가 가려졌다. 아마도, 손이 닿은 턱이, 뺨이 뚝뚝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세게 짓씹은 입술에서 비린내가 났다.
"그럴 리가."
"그래요. 놀라면 어쩌지 싶었는데."
"너와 난 서로를 알 수 있지않나."
깜빡.
그리고 곧 불쾌함이 온몸을 타고 기어오른다. 눅눅한 기분이 손 끝에 감긴다. 딱 적당한 푸른 기운이 그렇게나 기분이 나쁜 빛을 띤다. 들어낸 팔로 눈을 가리다 뒤척여 돌아눕는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새벽. 조용한 아침... 어떻게든 따라붙는 피곤과 불쾌감만큼 섬뜩한 것은 드물다. 보지도 않은 채 선반을 더듬는다. 건조하고 미지근한 결을 따라가다보면 차가운 무엇이 닿는다. 집어든다.
여섯시. 이십칠분. 누운 시각은. 세시. 생각이 툭 끊긴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참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해주어야할까. 모르는 일이다. 계속 누워있어서 잠에 드는 것도, 더 잔다고 괜찮은 것도 아니니 팔을 짚고 일어난다. 흩어지는 머리카락이 귀찮았다. 다 잘라버릴까. 아니, 곱게 접어둔다. 손목의 머리끈을 당겨 머리를 묶어놓는다. 다시 화면을 열어놓는다. 여섯시면, 저쪽은 몇 시지. 아침인가?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깨어날 즈음이면 네가 잠들 준비를 한다는 것 정도. 너는 몇 시에 잔다고 했지? 불규칙하지 않았나. 수마가 여태 목 뒤에 들러붙어 있나. 머리를 헤집는다. 액정을 두드린다. 메세지가 하나 날아와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싶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어 나를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그저 그저 그저 아무런 아무것도 그 어느 것도 비추지 않고 입은 걸어잠그고 눈은 감아버리는 게 나을 거라고
판단했어
*
"아포스타시아?"
머리카락이 흩어진다. 끄득, 그 목에서는 그런 소리가 날 것 같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종종 이렇게 부르기라도 하지 않으면 그 어깨에 매달린 눈이 버슥대고 커지곤 했으니까. 아직 들리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조용히 있으면 그는 목을 완전히 내게로, 정확히는 내가 있을 곳으로 돌린다. 눈을 살짝 찌푸리던 그는 곧 다시 머릴 틀어놓는다. 그래도 전엔 못 들었다는 말이라도 했던 것 같다. 안타깝게도, 내겐 닿지 않았어. 부터 시작해서, 무슨 말이라도 했나? 까지. 이제는 그런 것도 없다. 기대하지 않기로 한다. 누워있던 잔디가 바스락거리며 기지개를 편다. 코트를 대충 털어낸다. 그는 가만히 있다간 둥실 떠오른다.
허공이 갈라진다. 익숙한 공간에서 빠져나온다. 탁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파고든다. 사실 맑은 공기였을지도 모른다. 썩어들어가는 몸뚱이는 일반적인 기준에서 훨씬 멀어져있는 탓이다. 사방에 옅은 녹빛의, 푸른 기운이 흩어지고 있었다. 익숙했지만 이제는 아니게 되어버린 어떠한 것. 웃음은 나오지도 않는다. 껌뻑이며 명멸하는 시야가 어두웠다. 발을 굳이 디뎌야할 이유가 없었다. 발을 디디고 선 곳이 어디인지는 그리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숲은 대개 겉보기에는 다 똑같이 생겼다. 사시사철 언제나 잎이 돋아있거나 아니면 삭아 텅 비거나, 혹은 둘이 섞여 있거나. 지금이 겨울이던가. 호수는 말갛게 볕을 흩뜨린다.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고개를 들어 살펴본 나무 위에서 이질감을 느낀다. 갈색의, 검은... 둥지일지도 모른다. 일그러지던 소리가 새의 울음소리였다는 걸 깨닫는다. 그림자는 누워있다. 낙엽이 그리 많지는 않다. 봄이거나 여름이다.
문득 고개가 돈다. 무엇이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반사작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것이 눈에 띈다. 갈색과 녹색 사이에 이질적인 하양이 놓인다. 천천히 시선을 든다. 하얗고, 푸른, 눈부신 색. 그는 눈을 찌푸리거나 하지도 않는다. 그저 눈을 느리게 깜빡였을 뿐이다. 살아 있었나요. 그가 무심하게 툭 던져놓은 말은 아마도 그런 것이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는 시들어 있었다. 아주 조금쯤, 제 빛을 잃은 머리카락 끝이 나뭇잎의 그물망 아래서 흔들렸다.
"에브루헨은."
"엘을 움직이고 있어요. 영 불안정하더군요."
기운의 순환 자체는 나보단 그니까. 그는 곁의 나무에 기대어 섰다. 초점이 맺히지 않는 눈이 바닥에 내리꽂히다가 눈꺼풀에 가려진다. 눈을 가늘게 뜬다.
"유독 힘이 없어보이는군."
"그렇게 보여요?"
"그래."
"난감하네요."
그가 기대는 머리가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무어가 난감하지. 그러나 묻지는 않는다. 그와 내 사상은 아주 달라서, 아주 조그마한 차이로도 균열이 생긴다. 그걸 굳이 찾아낼 필요가 없으니 그저 입을 걸어 잠글 따름이다. 문득 피식 웃는 소리를 들었다.. 물음 대신 그를 멀거니 보기만 했다. 그는 다시 아주 조금 고개를 젖혔다.
"날 보자마자 묻는 게 에브루헨의 안부라니. 좀 믿기지 않아서요."
"문제인가."
"이젠 아니에요."
그치고는 반응이 늦다. 나는 별다른 의문을 갖지 않기로 한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 팔을 얽어 끼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검지로 팔을 두드리는 버릇이 있었다. 초조하지는 않을테다. 나뭇잎이 바람결에 쓸리는 소리가 난다. 잠깐만. 낮은 목소리가 흘러 발목을 붙잡는다.
"너, 팔이 좀 변했네요?"
"거슬리나."
"그런지도 모르죠."
그는 나무 줄기에서 떨어지다간 비틀거린다. 잡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다가와 섰다. 그가 팔을 풀어놓는다.
"내게 닿으면 기분이 나쁜가요?"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적어도 난 그렇거든요."
한쪽 눈이 일그러진다. 그가 농담도 할 줄 알았던가? 에브루헨의 영향인가, 아니면 그저 처음부터 있던 감각을 억눌렀을 뿐인건가. 아마도 후자다. 그는 양손의 장갑을 빼어쥐곤 내 손목을 잡아 든다. 죄인 손목에서부터 벌레가 기어오른다. 그의 표정도 썩 상쾌해보이지는 않는다. 문득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시선이 마주친다.
"…너."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었다.
"그래요. 이제는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겠네요."
그가 손을 놓는다. 손목을 한 번 매만지다간 놓아버린다.
파삭.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발 밑을 보자 파편은 없었다. 다시 고개를 든다. 그는 제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손을 한 번 죄어보다간 얕게 웃었다.
"에브루헨은 신전에 있어요."
가고 싶으면 가세요. 네겐 경중이 있는 것 같으니. 그는 덧붙이곤 두어걸음 뒤로 물러나 나무에 기대었다. 툭, 하는 작은 마찰음 뒤에 건조한 소리가 뒤따른다. 그는 그대로 내려앉아 무릎을 조금 끌어당겼다. 아주 조금.
"엘이 있을 곳은 당연히 신전이겠지. 갈테면 진작에 갔어."
"그래요. 그랬겠네요."
"같이 가겠나?"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건 흔히 언짢은 사람이 짓고는 하고는 표정이었다. 그의 눈이 잠시 구른다. 왼쪽, 오른쪽, 다시 중앙에. 별 의미는 없었을테다. 입꼬리가 오르고, 눈은 미미하게 제 모양을 잃은 채였다.
"배려의 탈을 쓴 동정인가요? 거부하고 싶은데요."
"어차피 같은 결말을 맞는다면, 동정할 이유가 없지 않나."
"같은 결말이기 때문에 동정을 하는 거죠."
"네가 그런 말을 할줄은 몰랐는데."
그는 눈을 풀고서 웃는다. 곁에 있으면 닮는다고 인간들이 그러잖아요. 그건 에브루헨에 관한 말인가. 아니면 인간인가. 그는 인간과 어울리는 것을 달가워하진 않았지만 특출나게 기피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적어도 기억상에서는. 중요한 사항은 아니다.
"동정보다는 연민일텐데."
"네가 방금 한 말 그대로 돌려줄게요."
안 어울린다는 거 알긴 하나요? 그는 퉁명스레 덧붙인다. 그랬던가. 침묵은 성가신 만큼 편리하기에 입을 닫는다. 여신의 영향은 에브루헨보다 그가 훨씬 더 많이 받으리라는 걸 안다. 그가 더 빨리 지워질 것을 알았다. 눈을 찌푸린다.
"여기에 계속 있을텐가."
"달리 몸을 놔둘 곳이 없으니, 그러겠죠."
"여기에 머무를 이유는."
그의 미간이 움틀한다. 없어요. 짧은 말이 덧붙는다.
"싫은가."
"뭐가요."
"네 마지막을 볼 게 나라는 것."
"반 정도는 그렇네요."
나머지 반은.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하는 것은 아니었다. 말은 삼킨다. 그는 이제 시선을 옮겨놓았다. 상관없다고는 하지만, 그에게 난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이는 존재다. 어쩔 수 없었다. 그도, 나도, 우리는 본래는 그렇게 설계되어있었다.
문득 깨닫는다.
"이봐."
그는 뭐냐는 말도 꺼내지 않는다.
"신전은 어느 쪽이지."
그제야 고개가 오른다. 크게 뜨인 눈 아래의 입이 하,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읽을 수도 없나요, 이젠?"
"안타깝게도."
"하, 하하, 하…."
간헐적인 웃음은 유쾌함을 내포하지 않는다. 그 흰 손이 올라 눈을 가리다간 내려와 입을 막는다. 초점이 사라진 불투명한 눈이 맺힌다. 아예 대놓고 말하지 그래요. 그가 속삭이듯 내뱉은 말이 발목에 감긴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난 널 완전히 이끌 수 없을지도 몰라요."
말하지 않는다. 그는 희미한 눈을 내게 흘리다간 스친다. 그의 발 밑에서 언제 떨어졌는지 모를 낙엽들이 파삭거렸다.
한동안 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나는, 천성적으로 대화를 즐기지 않았다. 에브루헨 역시 아마도 그랬지만, 여기에선 어떨지 나는 잘 모른다. 나뭇잎의 그물망을 뚫고 들어오는 볕에도, 머리카락을 흔들고 지나는 바람에도 꺼낼 말이 없었다. 내가 땅에 발을 디디는 것은 떠있느니만 못한지라 서 있었으나, 그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힘겨울텐데도 자세만은 올곧았다. 안타깝게도 거의 매 순간 그랬다.
신전은, 아마도 가까운 곳이 아니다. 그는 왜 여기까지 왔을까. 나는 그런 것까지는 잘 모른다. 아마 물어봐도 알려줄 필요가 없다며 입을 다물테다.
*******
네가 안개로 흩어지는 걸 본다. 수번, 수십번. 고하건대 나는 여느 순간부터는 세는 것을 포기했다. 너는 그때마다 울거나, 웃거나, 오히려 어느 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대개 웃었으나, 나는 네가 웃는 것이 싫었다. 차라리 울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봐야 너는 듣지 않았으니 입은 다문다. 이번에도 너는 그럴 것이다.
그 너머는 절벽임을 알면서도 그리로 달려갈 수밖에 없다는 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그는 우리에게 그렇게까지 냉혹할 이유가 있던가. 그는 우리를 생각하기는 했나? 그럴 리가 없지. 난 네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네 생각은 나와 다른 탓이다, 내가 말하면 너는 곧 말갛게 눈을 쓰는 탓이다.
비가 내렸다. 축축하게 젖은 흙이 발 끝에 닿는다. 웃자란 풀들이 발목을 간지르고 지난다. 습한 풀내음이 코 끝을 스친다. 시야를 가득히 메우던 고동색이 서서히 멎는다. 대신 젖은 녹색 위에 옅은 갈색이 흩어진다. 그리고 옅은 분홍이 점점이 피어나 있는 걸 본다. 바람이 모든 것을 흩뜨릴 때 너는 그 곁에 서 있었다.
벚꽃은. 희게 피어나 하늘하늘 알게모르게 떨어져내리는 꽃. 단지 한 순간의 미로 화하고 사라져 검게 짓이겨지는 꽃. 너는 그런 꽃 아래서 환히 웃는다. 나는 너를 안고 싶었는데.
너는 문득 돌아선다. 눈이 마주쳤던가. 디디던 걸음이 멎는다. 네가 웃었던가. 나는 그런 걸 알 수가 없어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네가 손을 흔든 듯도 했는데, 그게 내게 건네는 것이 맞을지 몰랐다. 네 고개가 기울었나? 조만간 네 목소리가 흐릿했다. 나는 다시 발을 내어놓는다. 사박이는 것 같았다.
너는 여전히 그곳에 기대어 서 있다. 이젠 네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목을 움직여도 온전한 문장이 나올까. 어딘가 으스러지지는, 뭉개지지는 않을까. 두려울 건 없으나, 그럴 바에야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 입은 걸어잠가놓는다. 네가 외쳤을 말들은 속삭임으로 가느다랗게 귀를 두드린다. 나는 고개만 가볍게 젓는다. 네 윤곽이 옅었다.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 답답한 일일줄은 몰랐는데.
네가 손을 든 것 같았다. 내가 네게 닿자 네 얼굴이 일그러진 날이 스친다. 무심코 몸을 뒤로 뺀다. 네 손은 잠시 굳는다. 왜 그러냐고, 네가 물어본 것 같았다. 너는 여전히 웃고 있나? 나는 모른다. 발 아래에 흙먼지가 묻은 벚꽃잎이 있었다.
시야 구석으로부터 연한 색이 차오른다. 네 손이었는지도 모른다. 고개가 움직이지 않았다. 흐렸던 네 얼굴이 선명해지다가 만다. 코 끝에 네 숨이 스치는 것 같다.
"보여요?"
귀에 먹먹한 솜이 끼어있는 것 같았다. 네 목소리가 겨우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네 손에 힘이 들어가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저 발을 뒤로 내어 주춤 빠져나온다. 네 표정이 다시 스러진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했다. 너는 가만히 서 있었다.
아니, 네가 발을 디딘다. 네가, 갑자기 일그러져서, 너는 갑자기 쓰러지는 줄로 알았다. 뻗은 팔 위로 흰색이 스친다. 네가 균형을 잘 맞췄던가... 나는 잘 모른다. 너와 함께 전투에 선 기억은 저 아래에 파묻혀 다시 꺼낼 수가 없는 탓이다. 너와 싸운 적은 아주 처음에 몇 번 있었으나, 그때에 너는 비틀거리기만 했으니 나는 알 턱이 없다. 네가 내 팔을 감싸고 등을 끌어당긴 것 같은데. 뺨에 네 머리카락이 닿은 것 같은데. 네가 날 안은 것 같았는데. 아주 낮게, 네가 뒤틀리는 소리를 내었다. 네 팔이 옭아들어온다.
너를 밀어도 괜찮을까. 내 손이 네게 닿아도 너는 괜찮을까. 생각은 흩어진다. 네가 울음을 참는 것 같았다. 무엇때문에? 네가 남기고 가는, 남기지 않을, 곧 사위어버릴 그 모든 것때문일지. 나는 잘 몰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중 내키는 일이 없었다. 나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너는 왜 날 놓지 않지? 말은 목으로 올라오지도 않는다. 배 속에 조용히 가라앉아 썩어갔다.
썩어갔다. 내 모든 것은 썩어 문드러질 것이었고 네 모든 것은 사위어버릴 것이었다. 너도, 나도, 그도, 우리는, 아니, 결국 모든 것은 사라진다. 온전히 돌아간다. 그러나 인지와 체감은 다른 영역이다. 너는 그걸 진작에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네 말들이 고막에 부딪쳤다간 그대로 조각나버린다. 낯선 소리들이 울리다 멎는다. 피부가 떨어져나가는 듯한 기분같은 건 없을텐데. 어깨가 젖어드는 착각이 인다.
무엇이 문제지. 내 전부가 그러한가. 그럴지도 모른다…. 네 팔은 여전히 날 놓지 않는다. 너는 분명 아플텐데. 그 시간들이 흉처럼 남은 네게 나는 악몽 그 자체일텐데. 이해는 할 수 없었다.
네가 울고 있었나. 나는 잘 모른다. 시야에 비치는 네 얼굴이 붉었다. 불규칙한 숨이 스친다. 무심코 손이 오르다간 떨어져나간다. 네 울음의 여부조차 확인할 수 없다. 네 말이 어긋난다. 바닥에 곤두박질친다. 문득 네가 내 손을 잡은 것 같았는데. 아니, 실제로 그랬다. 흐린 네 손과 내 손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을 본다. 손을 움직여야했는데. 너는 오히려 내 손을 더 세게 쥐었다. 네 입이 툭툭 끊겨나갔다.
어차피 나는 사라져요.
네가 그런 말을 했던가. 시야를 좁혀도 흐릿한 상이 맞춰지는 일은 없었다. 나는 네가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안녕.
나는 맛이라는 게 뭔지 몰라요. 맛있다는 게 뭔지 몰라요. 맵고, 짜고, 달고, 시고… 난 그런 게 뭔지 잘 몰라요. 내게 음식은, 차갑거나, 뜨겁거나, 미지근하거나, 푹신하거나, 딱딱하거나, 아삭거리거나, 뭉글하거나. 그 정도예요. 맛에 대한 건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미련같은 게 생길 틈이 없었어요, 나는. 물비린내, 지나가는 차로부터의 매연, 누군가가 뿌린 듯한 향수향, 방향제의 향 따위도 몰라요. 싱그러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향기롭다는 게 무슨 말인지 나는 몰랐어요. 알고 싶지 않았어요. 알면 안 되는 어떤 것이었으니까. 내게는.
다시 한 번, 안녕.
나는 향을 거의 느끼지 못해요.
음, 그래요. 거의.
에브루헨은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아포스타시아가 자리를 비웠을 때 에브루헨이 하는 일은 간단하다. 제 꼬리의 비늘의 개수를 세고 있거나, 창 밖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멍하니 보고 있거나, 거울을 향해 물총이라도 쏘거나. 찰박, 옅은 녹빛의 꼬리가 수면을 두드린다. 에브루헨은 시각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주 잘.
그건 욕조라기보다는 수조에 가까웠다. 에브루헨에게 그건 썩 달갑지는 않았다. 오히려 거부감이 들었다. 에브루헨은 그게 저를 위해 준비한 것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건 관상용 물고기를 가두는 창이나 다름없지않나. 에브루헨은 그를 사랑했으나, 하나의 눈요깃거리로 전락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결과는? 욕조 하나.
안녕?
아주 처음에 너는 웃고 있었다. 네 머리카락 끝이 황혼에 희게 부서져나갔다. 무어가 그리 즐겁지. 나는 묻고 싶었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침묵이었으나 아주 약간의 짜증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탓이다. 웃을 수 없는 상황에서 너는 웃고 있었던 탓이다. 상대방의 기분조차 상하게 될 바에는, 차라리 아무런 말도 하지 말 것. 살면서 배운 건 그 정도 뿐이었다.
너는 내가 말하지 않는 것에 아무런 불만을 품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것처럼 내 곁에 풀썩 앉았다. 나는 반쯤 아무 생각 없이 옆으로 조금 떨어져 앉았다. 네가 내게로 고개를 튼 것 같았다, 너는 내가 멀어진 만큼 따라와 앉았다. 나는 시선을 들어 네 눈을 마주했다. 처음으로.
녹색 눈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어쩌면, 환한 낮에는 아주 아름다운 색으로 빛날 것 같은 눈은 저무는 해에 색이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품은 빛만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너, 여기 살아요?"
네가 인사말 외에 처음 꺼낸 말은 그런 것이다. 미간이 조금 일그러진다. 나는 내 앞머리가 무척이나 길어 눈도 잘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볕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 입이 움직였던걸까. 너는 눈을 한 바퀴 굴렸다.
"같이 있어도 되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한다.
*
축음기가 돌아가는 소리는 요란하다. 바늘이 LP판을 긁는 소리만이 울린다. 나는 눈을 감고만 있다. 머리카락에 아주 약한 바람이 느껴진다. 눈을 슬그머니 떠 보면 멀뚱히 날 내려다보는 눈 한 쌍이 보일 뿐이다. 다시 눈을 감는다.
"저어, 난 헛 게 아니에요."
대답하지 않는다. 발소리가 주변을 맴돈다. 바로 오른쪽, 뒤로, 다시 왼쪽으로, 곧 정면으로. 으으음. 잠시 앓는 소리가 났다. 안 본 사이에 다치기라도 했나…. 생각은 종종 말소리로 바뀌고는 한다. 가볍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난다.
그는 종종 내 말을 듣지 못한다. 듣지 않는 게 아니라, 듣지 못한다. 회색 연기가 자욱하게 번진다.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검은 눈이 바닥에 떨어진다. 다가가 손을 흔들면 그 검은 구슬 한 짝이 데굴 구르다 전신이 바득 떤다. 그는 입에 물고 있던 담뱃대를 저 한 구석으로 내팽겨쳐버리곤 동시에 크게 한 걸음 물러선다. 그의 그런 성의, 배려는 이제 내겐 별 쓸모 없는 일이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는데도 그는 여전했다. 습관일까? 아니면 여전히 의미없는 배려일까. 나는 잘 모른다. 침묵. 다가선다. 그는 오히려 뒷걸음질을 더 쳐서 고개를 굳이 들지 않아도 시선이 마주할 수 있는 위치에 선다. 오지 마. 그가 낸 목소리는 어느 짐승이 목에서 내는 울음같았다.
"왜요?"
"네게는 해가 될 거야."
"그건 중요한 일인가요?"
"아주."
내게, 그에게. 혹은 둘 다. 굳이 묻지는 않는다. 고개를 가로젓다간 웃는다. 무슨 일이지. 그의 말은 다소 늦는다. 그래도 무어라 하지는 않는다. 대신 입을 연다.
"내가 보고 싶어서 왔어요."
"항상 보잖아."
"떨어지고 싶지 않아요."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다만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눈은 얼어붙기 시작해서 이젠 눈을 가늘게 뜨는 게 별 효과가 없을텐데도 그는 그랬다. 아마 그건 사람들의 공통적인 습관이다. 그가 이제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몸에 온전히 배어버린 행동은 쉽게 떼어낼 수 없는 탓이다. 그는 곧 눈을 감는다.
"…굳이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을텐데."
"말은 했죠."
"왜 듣지 않지?"
"말은 말일 뿐이니까요."
그는 웃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얼굴을 일그러뜨리지도 않는다. 단지 눈을 한 번 감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가 말 뿐이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기로 한다. 뒷짐을 진 손이 간지러웠다. 문득 그가 생각난 것처럼 말한다.
"너, 칼은."
아, 맞다.
순식간에 얼굴이 굳는다. 멀리서도 그게 보이나? 그는 입술을 한 번 깨문 것 같았는데. 그가 제 소매를 코에 갖다댄다. 그건 그리 효율적인 일은 아니었다. 그는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다 말고 다가와 섰다. 아주 희미하게, 지끈거리는 내가 났다. 그의 검은 손가락이 내 이마를 톡 치고 스친다.
"들고 다녀."
"그거 너무 무겁단 말예요."
가벼웠던 바람은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탁, 가볍게 부딪힌 이마가 알알했다. 조심해. 그가 낮게 한 말은 귓불을 간신히 잡았으나 곧 떨어져 부서졌다. 나는 그저 웃을 따름이다.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그는 이제 노골적으로 미간을 찌푸린다. 눈을 감았으나 뺨이 얼얼할 일은 없었다. 어깨가 밀리지도 않았고, 옆구리가 욱신거리지도 않았다. 목이 강한 힘에 눌리지도 않았다. 발소리가 곁을 지나친다. 눈을 뜨고 뒤돌아보면 그는 절뚝이며 걷고 있었다. 종종걸음으로 뛰어 곁에 가 선다. 잡아줄까요? 됐어. 돌아오는 대답은 짧다. 문득 그의 목이 흰 것이 거슬렸다. 발을 디딜 때마다 콘크리트 조각이 바작바작 몸을 뒤틀었다. 그의 발은 무겁고 바닥의 잔해를 쓸고 지난다. 밑창이 갈려나가는 소리는 유쾌하지 않다. 있잖아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왜 검은 옷만 입어요?"
"거슬리나?"
"왜 내 말을 항상 나쁘게 듣는 거예요?"
"넌 말을 꼭 돌려했으니까."
편해. 그것 뿐이야. 뒷말이 잔해의 비명에 잡아먹힌다. 검은색, 검은색. 그러나 막상 내게 주는 옷은 밝고 맑은 옷. 본인은 검고 어둡고 음침한 옷. 정말 편한 것 뿐인걸까. 나는 그가 유일하게 몸에 대는 흰색이 내 탓이라는 걸 알았다. 거짓은 언젠가 부서지기 마련이다. 멈춰선다. 그는 몇걸음 정도 더 가다간 돌아 날 본다. 눈꺼풀이 힘없이 오르내리는 걸 지켜본다.
"정알로요?"
"왜 그렇게 집요하지?"
"담신은 왜 그렇게 감추는데요?"
난 이제 무너진 살갗 점도는 봐요. 그의 곁 난간에 선다. 튀어오른다. 그는 별 말은 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어떤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열리던 입이 닫히는 걸 보는 일은 유쾌하지 않다. 그의 검은 발이 바닥을 쓸며 내는 소리가 발목을 붙잡고는 했다. 나는 너보다 둔해.
"모든 것에 그렇고, 앞으론 더 심해질걸 알아."
그는 그런 말을 한다.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가 하고싶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일엔 익숙했다.
"무딘 나와 예리한 네게는 같은 것이 닿아도 아주 다르게 느껴져."
신호등은 언제나 깜빡이고 있다. 그걸 따지는 일은 생각보다도 훨씬 영양가가 없는 일이다.
그의 말꼬리가 끊겼다. 예사는 아니었다. 하루에 한 번으로 끝나면 운이 좋은 일일 뿐이다.
눈 감아. 그의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숨과 함께 닿는다.
며칠째지. 나는 세는 걸 그만두었다. 그동안 나는 좀 자랐고, 그는 죽어갔다. 당장 내일 스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기를 잃어갔다. 아주 처음에 아직 색을 띠고 있던 눈은 이젠 거의 검은색이 되었다.
그들이 썩어가는 순서가 어떤지 나는 모른다. 그도 잘 모른다고 했다. 어쩌면 개인차인지도 모른다. 그는 내 머리칼을 그러쥔 채 숨도 닿는 거리에서 날 마주하기도 했다. 내가 그에게 꼭 해야만 하는 말은 아주 큰 외침이거나, 글귀로 인한 요철이기도, 혹은 아예 간단한 점자이기도 했다.
그의 시야가 검은 것은 아니었고, 검고 두꺼운 막이 귀에 덧씌워진 것도 아니었다. 목에 구멍이 뚫린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아주 희미한 감각들이다. 상이 아주 어긋나 경계가 흐릿한 색의 나열, 늦은 밤 저 건너의 차가 지나며 나는 타이어의 신음, 여느 짐승의 울음과도 같은 괴악한 소리. 그 정도로만 남아있다고 했다. 향에 대해 그는 원래 좀 둔한 편이었다고 한 것 같다.
그에게 남은 건 아주 예민해진 몸상태 뿐이다.
*
그는 곧 우뚝 선다. 가끔 그의 반사신경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원래 그랬다고 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는지는 몰랐다. 그는 가만히 서 있었다. 무언가를 재는 것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 왜 그러냐는 말소리가 닿지 않을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감싸인 손이 죄이는 걸 잠자코 보고만 있었다. 그의 눈이 쉼없이 구르는 걸 말끄레미 보기만 한다. 그는 무언가를 시야에 담아 뇌에 새기기 위해 눈을 움직이지 않는다. 그건 생각에 의한 반사적인, 습관적인 움직임일 뿐이다. 판단이 끝나기를 조용히 기다린다. 그는 조만간 아주 갑작스레 방향을 틀어 발을 디딘다. 어느정도 익숙해진 탓에 휘청이지도 않는다. 다만, 쿵, 하고 발이 잠시 엉킬 뿐이다. 그럼 그는 다시 멈춘다. 이번엔 재는 게 아니라, 나를 돌아보기 위해. 내가 있을만한 곳에 닿은 눈이 평소보다 조금 더 열려있는 걸 보곤 한다. 괜찮냐고 묻는다. 매번 하는 반응이 달라질 생각을 하질 않는다.
! 음... 폭력적인 장면이 녹아 있을 수 있습니다...
이건 시시한 이야기다. 어디에나, 어딘가에든 있을 법한 이야기다. 그러니 시덥잖다. 나는 내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오히려 궁금했다. 파직, 전구의 명멸이 요란했다.
나는 우선, 향을 맡지 못한다. 어릴적의 사고였는지 뭔지 모른다. 미각 역시 내게는 먼 이야기다. 내게 음식이란, 물컹하거나, 푹신하든가, 딱딱하든가, 부드러운, 아삭거리는, 그런, 질감에 대한 것이었다. 달고, 짜고, 쓰고, 맵고, 느끼한, 신, 그런 단어들은 내게 아주 먼 국가의 일과 같았다. 아무 맛도, 향도 느껴지지 않는 것들을 기계처럼 끄득끄득 씹어넘긴다. 말 그대로 생을 이어가기 위해 행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생의 삼대 욕구 중 하나가 식욕이라는 말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정상인 줄 알았다. 내가 다르다는 것을 몰랐다. 맛있다는 표현은, 식감이 좋다는 표현인 줄 알았다. 적어도 내가 말을 쓰는 법을 시작할 즈음까지는 그랬다.
내가 있던 고아원은 그리 큰 곳이 아니었다. 적당히 시골의, 적당한 성당에서 아이를 떠맡는 것이다. 내게 부모님은 없었고, 많은 수녀와 몇 명의 신부가 친척처럼 날 대했을 따름이다. 어머니, 아버지, 그런, 건 없었다. 우리의 아버지는, 어머니는 신일 뿐이라고, 그들은 내게, 그 아이들에게 가르치고는 했다.
친구, 였나?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첫만남은 떠오르지도 않도록 아득하다. 애초에 우리는 같은 일시에 같은 곳에 버려져 여느 수녀가 발견한 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까마득하다. 너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찾았고, 함께 다녔다.
나는 향을 모른다. 비의, 풀의, 꽃의, 물과 땀, 막 산 옷의, 오래되어 상한 음식의, 탁한 먼지의 내와 향을 알 수 없었다. 그건 미각보다는 훨씬 먼저 드러난다. 나는 곧잘 상한 음식을 먹었고, 자주 아팠다. 머리가 좀 굵어지고 나서야 구분법을 겨우 찾았을 뿐, 그때는 그저 주면 먹었다. 있으면 먹었다. 어차피 내게는 다를 게 없었으나, 정작 내 장기들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그렇게 앓을 즈음에 너는 내 손을 잡아주곤 했다. 손 위에 겹쳐진 손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 맞잡은 네 손에서, 네가 끼고 있던 장갑에서, 목에 두르던 목도리에서, 향을 맡았다. 이상할 정도로, 아주, 아주 희미하게 네 체향만을 맡을 수 있었다. 다른 건 닿아도 알아차릴 수 없는데, 오로지 네 향만을 알았다. 그건 무어라고 칭하지? 그건, 네 향은 비유하자면 어떤 것이지. 나는 모른다.
영영 모를 것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아포에브] 무제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된 건 언제지. 아마 학교에 진학할 즈음이다. 포크와 케이크에 대한 교육은 늘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학교폭력과 성폭력에 대한 교육처럼, 학교에서는 잊을만하면 그에 대한 영상을 틀었고, 잊을만하면 강사를 초대해 강연을 들려주었다. 나는 그즈음이 되어서야 네가 케이크였다는 걸 알았다.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네가 다른 가정에 들어가는 걸 그냥 보는 게 아니었는데. 같이 가기라도 했어야했는데. 엉엉 울며 내 손바닥에 삐뚤빼뚤하게 적어준 주소를 어딘가에 옮겨적어놨어야했는데.
그 볼 줄도 모르는 지도를 들고, 아주 애매한 차비를 들고 어떻게든 성당에 다시 찾아갔을 때, 기록이 없다고 했다. 맥이 쭉 빠졌다. 어느 지역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성당엔 못 보던 아이들이 내가 있을 적만큼의 수 정도로 들어와 있었다. 딱 차비만 챙겨갔던 탓에 점심도, 저녁도 굶고 다시 돌아갔다. 허기는 졌으나 무언가를 먹고픈 생각은 없었다. 그날처럼 호되게 혼난 날은 손에 꼽힌다. 늦은 저녁은 가시가 돋친 줄기를 씹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너를 생각했다. 네가 어떤 해를 당하진 않았을까 불현듯 생각이 나고는 했다. 나는 학교에서 이따금 너와는 다른 향을 맡았다. 그 향을 낸 아이는 조만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아이들은 잊을만하면 국화꽃을 사와야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일이 몇 번인가 일어날 수록 나는 네 환한 웃음을 다시 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네 밝은 목소리를 귓가에 남겨두려 몸부림쳤다. 물론 기억은, 무엇이든 언젠가 바래기 마련이다. 내게 남은 네 인상은 나와 마찬가지로 재색 머리면서 다르게 선명한 하늘색이 드문드문 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학창시절은 그리 유쾌한 편은 아니었다. 나는 또래 사이에서 좀 딱한 아이 정도로 인식되는 모양이었고, 내가 포크라는 걸 눈치채는 아이는 없는 것 같았다. 가끔 짓궂은 몇몇이 평소엔 먹지 않는, 아니, 보통 먹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어떤 것을 먹어보라며 내밀기도 했다. 귀찮아지는 건 질색이라 정말로 아드득 씹어넘기면, 그러면 집에 와서는 꼭 구충제를 먹곤 했다. 알리지는 않았다. 평탄하다면 평탄했고 아니라면 아닐지도 모르는 날을 보냈다.
계절은 수도 없이 지났고 해는 셀 수 없이 뜨고지고를 반복했다. 수천, 수만, 수억개의 나뭇잎이 피었다가 지고 꽃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나는 꽤 자랐다. 먹지 않는 내 몸은 자연스레 좀 말랐다. 간신히 닿던 책꽂이 네번째 칸에는 손만 살짝 들어도 자연스레 닿게 되었다. 네가 없으니 나는 머리를 땋지 않았고, 몇 년간은 엮어주던 손길도 자연스레 뜸해져갔다. 나도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는 못했으니 머리는 좀 더 엉켜갔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까지는 공학 학교에 다녔다가, 고등학교때는 남학교로 갔다. 별 이유는 없었다. 그저 거기에 배정되어서 그리로 갔다. 좀 후회를 했던 것 같다. 후회할 구석도 없었는데. 또래들은 이따금 입에 올리기도 수치스러운 음담패설을 했고, 툭하면 욕설이 오갔다. 싸우는 건 아니었다. 입에 익은 것 뿐이겠지.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는 받지 않았다. 적당히 공부해서 적당히 만족할만한 성적을 받았다. 그즈음 되니 내가 향을 맡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음. 정말로, 거의 없었다.
고등학교씩이나 되어서야 전학생은 드물다. 기껏해야 일년에 한 명 있을까말까였다. 남학교의 인문반이었다. 떠나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미미하게, 의식들이 며칠간 소문처럼 교실 내를 떠돌았다. 조례 시간 겸 아침자습시간이었다. 조용히 뒷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저 숙제때문에 손을 놀리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나는, 향을 맡았다.
별 소개는 없었다. 그냥 나는 뒤를 돌아봤다. 거진 태반의 시선이 그러했다. 잠깐 토끼눈으로 뜨이던 눈이 다시 감긴다. 아주 얕게 목례를 한 그는 무언가를 찾듯 교실을 빙 둘러봤다. 눈이 마주쳤다.
왜 웃지. 든 생각은 그런 것이다. 귀에 미미하게 거슬릴 정도로만 울리는 발소리가 바로 곁에서 멈춘다. 아주 자연스레 책상에 제 가방을 걸고 의자를 소리없이 당겨 앉았다.
안녕. 네가 입속말을 했다. 네가.
나는 너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너는 나라는 걸 몰랐나보다. 하기야 그랬다, 너와 난 이름이 바뀌었고, 그만큼 좀 바뀌었으니. 네 머리카락은 이제 완전히 회색으로 물들어있었고 눈웃음은 조금 더 짙어져있었다. 향도 그런 것 같았고.
나는 참 불안했다. 학교에 내가 모르는 포크는 있을 법했고 케이크는 없었다. 전부 실종되거나, 죽었다. 그렇게 교내에 케이크는 한 명도 없었는데, 네가 생긴 것이다. 포크들에게 케이크는 왔다가 아니라 생겼다에 가까웠다. 나는 거의 매일 불안에 시달렸던 것 같다. 너는 아마 몰랐겠지만.
난 집이 멀었다. 아마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때문에 일찍 나와서 교실을 여는 건 나였는데ㅡ그래봐야 별로 일찍도 아니었으나 반에는 정각에 가까워서야 도착하는 타입이 태반이었다ㅡ 어느 날부터는 네가 앉아있었다. 안녕? 너는 참 헤프게도 웃었다. 나는 네 인사를 굳이 무시할 이유가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너는 변했다면 변했다고도, 그대로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난 아니었으니까. 네가 날 보면, 내가 나였다는 걸 알았을 때의 네 표정을 대략 알 것 같아서였다. 그제까지의 내 기억에 박제된 너와 내 앞에 살아있던 네가 다른 인물일 수도 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너는 아마 교무실에 다녀왔을테다. 네가 마침 비어있던 내 자리 옆에 멋대로 앉았는지, 아니면 담임에게 지시를 받았는지 나는 잘 몰랐다. 매 순간까지는 아니더라도 매 시간동안 나는 네 향을 맡았다. 취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제까지도 케이크를 한 번도 입에 댄 적이 없던 탓이다. 그저 네 곁에 있으면 그렇게나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나는 요리에 간을 맞춘다는 것이 무언지 모른다. 가루를 얼마나 넣어야하는지, 나는 그런 걸 잘 몰랐다. 그저 밥이 질게 하려면 물을 얼마나 넣고, 재료를 어느 정도의 크기로 썰어야 고유의 식감이 남고, 스크램블이 부드러우려면 어느 정도의 불에서 어느 정도가 될 때까지 젓고, 고기를 어느 정도의 불에서 얼마나 익혀야 하고... 내게 요리는 그런 것이었다. 너는 꼭 기겁을 하며 날 말리고는 했다.
커튼이 희게 한들거렸다. 돌아보지도 않고 알 수 있었다. 빛을 흐뜨리는 재질의 천이 빙글 돈다. 달린 보석들이 그리도 맑은 소리를 내며 박수를 친다. 뿔이 한풀 꺾인 커다란 고깔모자의 챙에 그의 얼굴이 가린다. 그는 제 모자를 젖히며 곱게도 웃는다. 안녕? 물론 그는 내 안녕을 물은 게 아니다. 그건 그저 아주 상투적이고 형식적인 인사말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는 단어일 뿐이다. 가위가 보이지 않는다.
"안 불렀는데요."
"그냥 와본 거예요. 와아, 여전히 삭막하네요!"
인간의 집이라고 누가 믿겠어요. 톡, 가벼운 어떤 것을 건드리는 소리가 났다. 설마 하는 생각으로 돌아본다.. 광택제조차 발려있지 않던 밋밋한 서랍장이 반짝이는 장식장이 되기가 아주 금방이었다. 돌려놔요. 싫어요? 이런 거 하나쯤은 있어야 방이 좀 살죠. 죽은 것들 사이에 산 것이 하나 있다고 죽은 것들이 살아나진 않아요.
매정해라. 그가 그런 어투로 꿍얼대는 소리를 들었다. 에브루헨. 그는 옛적부터 참견이 꽤 심했다. 남이사예요. 종이더미 사이에서 겨우 가위를 찾는다. 하나 새로 사야할까, 아니, 길을 들이는 건 영 성가시다. 천을 자르면서 생각도 함께 자른다. 서걱이는 소리는 언제부턴가 듣기 싫은 것이 되었다.
"흐음. 많이 바빠요?"
"보면 알잖아요."
"그럼, 내가 청소 좀 해도 돼요? 발을 딛고 서기가 무섭네요."
힐끔 돌아보니 아무것도 신지 않은 채 둥둥 떠있는 흰 발이 있었다. 한숨은 삼킨다. 잘려나간 천의 끝을 잡는다. 고개를 끄덕이면 바람이 일었다. 등 뒤에서 딱, 딱하는 소리가 들린다. 무언가 어딘가에 꽂히는 소리가 나기도 했고, 무언가 쓸려나가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독특한 곡조의 콧노래소리가 영 불편했다. 바늘구멍에 실을 넣어주는 기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슬슬 요령이 생길 만도 한데 어쩐지 한결같이 눈이 아팠다. 겨우 실이 꿰인 바늘을 올 사이에 찔러넣었다.
"이 아이, 마감 끝난 거예요?"
"몸체만을 말하는 거라면, 끝났어요."
"그래요."
문득 불안한 생각이 지난다.
"잠깐,"
! 아메가 완벽한 경어를 씁니다
뚝, 무언가 끊겨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갉는 소리는 없었으니 쥐는 아니었다. 실은 끊기지도 않았다. 문종은 움직이지도 않았다. 바늘을 천 위에 슬그머니 내려놓는다. 등 뒤가 사했다. 일부러 켜지 않던 등에 불을 놓는다. 잔을 들면 불이 한들거리며 춤을 췄다. 기분탓이라면 좋으련만, 대개 이럴 때의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 법이니. 본래의 용도를 상실한 채 쓰이던 식칼을 집어든다. 낡은 나무바닥을 발이 끄는 소리가 요란했다.
갑자기 바로 뒤에서 퍽 소리가 났다. 놀라 촛농이 손에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뒤를 돌았다. 누군가 꿈틀거리며 누워 있었다. 어쩐지 폭력적이다… 안도의 한숨 비슷한 것이 나온다. 아니나 다를까 곧 천이 크게 일렁이는 소리가 났다. 왜인지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목소리도 함께.
"너 바보예요? 어두운 곳에서 등을 켜면 나 여깄소 하는 거랑 뭐가 달라요?"
어? 잠깐, 너 손! 그는 발이 땅에 닿자마자 무어가 그리 급한지 내 앞에 달려와 섰다. 불어 끈 잔이 둥실 허공에 뜬다든지 하는 일은 이제 눈도 깜짝 않고 볼 수 있었다. 여느 순간 손 위에 물이 한 줄기 쏟아지고 얼음이 생겨나는 것도 낯설지 않았다. 말이 입 밖으로 조금씩 새었다.
"미안하게 됐군요."
"다음이 있다면, 등은 절대로 켜지 말아요."
다음에는, 이 아니다. 그는 제 실력에 아주 자신이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처럼 위협이 목 끝까지 차오른 건 이번이 세 번째인가. 사람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마술사이기 이전에 사람이었다.
됐어요, 움직여볼래요? 그가 손을 거둔다. 떠 있던 등은 언제부턴가 서랍장 위에 놓여 있었다. 손을 뒤집고, 다시 폈다가, 한 번 죄었다.
"그래도, 당신은 오실 것 아닙니까."
"허, 내가 그렇게 한가해보여요?"
"아닌가요?"
그는 웃는다.
"물론, 맞아요."
아하하하하.
그 특유의, 기분 좋을 때만 나오는, 너털웃음이 귀를 탕탕 두드렸다. 물론 달리 반응하지는 않는다. 피의 기분나쁜, 더러운 향이 코를 찔렀다. 그게 그의 혈향인지 뭔지, 나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냉정하네요- 아모치온은. 어차피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앞에 다가와 설 게 뻔했다. 실제로 그리 했고. 검은 예복이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 역시 엉긴 무언가로 말라붙어 있었다. 노골적으로, 미간을 찌푸린다.
"내가 네게 축복이라도 내려줄 것 같아요?"
"아,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나 좀 섭섭해지려고 하는데."
"잘 됐네요, 좀 나가떨어져 줄래요?"
그러면 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푸흐흐 웃었다. 으레 인간들이 어린 꼬마애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 마냥, 그는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나는 표정없이 있었다. 그는 내 어깨 너머로 손을 뻗었다. 그러고도 닿지 않는지 허리를 숙였다. 코에 닿은 그의 어깨에서 지나치게 짙은 핏내와 먼지내가 섞여났다.
나는 네 말을 믿지 않는다. 감정만큼이나 사사롭고 변덕스러운 것도 찾기 힘들다. 너는 언제나 웃으며 사랑을 속삭이지만 너도 언젠가 네 마음을 전부 끊어낼 것을 안다. 네 웃음이, 흘러 넘치는 너의 말들이 언젠가 메말라 버릴 것을 안다. 그건 네 자의일지도, 아닐지도, 그러나 아마도 타의리라. 너는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위어 바스러질 것이었다. 너는 종종 찾아와 농담처럼 잊기를 소망하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러나 때로, 어떠한 거짓말의 이면에는 간절한 바람이 깃들기도 함을 난 알고 있었다. 네 말은 포장지로 아주 견고하게 감싸인 무엇이었다. 모든 거짓말이 영원하지는 않은 법이다.
밤은 아주, 아주 길었다.
*
"넌 참 낮과 거리가 머네요."
네게 눈을 흘긴다. 너는 풀줄기 사이로 제 손을 뻗어 솜씨좋게 풀을 엮고 있었다. 낮. 낮은 밝고, 때로는 불쾌하면서도, 때로, 아니, 보통은 희망을 상징한다. 나는 별달리 말을 꺼내놓지는 않는다. 너는 무릎 위에서 꽃을 한 송이 집어들어 줄기들 사이에 꽂았다. 꽃의 녹빛이 말려들어가는 걸 보고만 있었다.
"도적에게 시비가 붙은 적은 없어요?"
아, 낮엔 눈을 안 붙이나요? 너는 손을 멈추곤 날 보며 웃었다. 정말 맥락을 읽기 어려운 문장이었다. 네가 숨긴 말은, 네게 설마 도적이 꼬이진 않겠지만 넌 눈을 감고 웅크리면 그럭저럭 순해보이거든요, 따위의 말이었으리라. 얼굴을 찌푸리지는 않았다.
"참견이 심하군."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잖아요?"
시끄러운 곳을 좋아하냐면, 절대로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애초에 내가 그렇게 생겼냐고 물어볼 것이다. 나는 모든 소리가 웅웅 울리고, 사람들의 함성이 귀를 찌르는, 그런, 곳을 싫어했다. 사람들이 생기를 지나치게 흘리는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곳은 되도록이면 피해다녔다. 그랬는데.
"왜 그래요?"
곁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났다. 뒤에 무어라 말이 덧붙었는데,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의 말소리는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묻혀 부서졌다. 눈살을 조금 찌푸리고 있으니 그는 아무래도 제 말을 못 들었다고 판단했는지 다시 입을 움직였다.
"속 안 좋아요? 나랑 바람이라도 쐴래요?"
푸른색이었다간 다시 녹색으로 바뀌고, 보라색으로, 붉은 색으로 뒤바뀌는 조명 아래서 나는 그의 얼굴이 붉은지 어떤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는 무어가 그리 신나는지 웃고 있었다. 원래 웃는 상일 듯한 얼굴이 눈웃음까지 더해지니 과장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시 시선을 돌려놓았다.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움직여 눈을 잠시 눌렀다.
"참견이 과하군."
"참견은 아니에요."
내가 나가고 싶거든요. 그는 환히도 웃으며 말한다. 초면인데도 거리낌이 없고 요령이 좋다. 아마도 그는 원래 이렇게 뻔뻔한 성격인 것 같다. 이건 아마도 권유를 빙자한 부탁이다.
"난 덜 마셨는데."
시야 구석에서 머리 하나가 갸웃거렸다. 그가 무어라 말했는데, 듣지는 못했다. 뻗어져나온 손의 가락은 곧고, 마디가 튀어나와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말라 있었다. 그는 티슈 한 장을 잔 위에 올려두었다.
"짠. 이러면 잠깐 자리를 비워도 괜찮아요."
"뭐?"
"한시간 정도? 는 눈 감아 주거든요."
그쵸? 그는 웃으며 바텐더를 쳐다봤다. 셰이커를 손질하던 바텐더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 한 구석이 지끈거렸다. 안쪽에서 누군가 끝이 뭉툭한 막대기를 들고 바깥쪽으로 쿡쿡 찌르는 느낌이 든다. 한숨은 삼킨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다. 바에 앉은 건 나와 그 뿐이었다. 그는 말하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이번엔 바텐더에게 계속 무어라 재잘거리고 있었으니. 아마 바깥에 나가서도 말동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거겠지. 그래. 덜컹이며 일어난다. 소매자락이 아주 작게 뒤로 당겨지고 있었다. 무심코 돌아보자 조금 커진 눈과 마주했다. 난 그의 눈이 본래 무슨 색인지 모른다, 그저 그의 눈은 이제 파랗게 변한 조명 아래서 영롱했고, 잠깐 눈꺼풀에 가려지다간 곱게 휘었다. 샐쭉 웃었다. 뭐가 그리 좋지. 한숨은 결국 소리를 죽인 채 새어나온다. 바깥은 여름임에도 비교적 서늘하게 느껴졌다. 야경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아, 맞다."
문득 그는 제 지갑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