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랍
16
이번에도 드랍
2018 중반~ 현재까지의 드랍들입니다.
ㅋ 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진짜 바쁘긴 했구나!
암흑기사 잡퀘 스포일러 및 희망의 등불, 창천의 이슈가르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라하가 나오는 글에는.....크리스탈 타워 연대기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뭐라는)
여기서 FF14의 빛전은 저희집 남코테예요.
왜인지 썰폴더에 있던 조각글도 섞여있습니다.
드랍이니까 퇴고 대충했습니다(^^;
모험가는 유독 불편했다.
모험가는 홀대에 익숙했다. 영웅이 되기 이전부터 그랬다. 오히려 영웅이 되고 난 뒤 받는 사탕 발림, 혹은 드물게 진심어린 경외감 등을 낯설어했다. 모험가는 그런 것에 진저리가 난 눈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모험가는 조용히 고갯짓으로만 의사를 표현하고는 했다. 그는 감정을 잘 숨겼고, 때로는 제대로 숨기지 못하기도 했다. 아마 모험가는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추측한다.
프레이. 모험가가 이따금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모험가가 프레이를 만난지는 고작해야 일주일 남짓이다. 모험가는 프레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나 프레이는 모험가를 아주 오래 알았던 것처럼 말하곤 했다. 모험가는 불 앞에 앉아 꼬치를 뒤집으며 그를 생각한다. 프레이를 어디선가 봤던가. 아니. 단언컨대 아니었다.
프레이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흰 숨을 피워내고 있었다. 안 추운가. 모험가는 커르다스의 추위에 익숙하지는 않았다. 서부고지는 중앙고지보다도 매서운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갑주라니. 모험가는 웅크린다. 문득 모험가는, 꼬치가 다 익은 것 같다고 생각한다.
모험가는 뻐적이는 눈을 밟는다. 모험가의 뭉툭하고 굳은 손이 그의 어깨에 오른다. 모험가는 제가 온 뒤를 가리키고는 프레이를 잡아 이끌었다. 모험가는 프레이의 목소리는 잘 듣지 않았다. 그래서, 딱 알맞게 익은 꼬치 하나를 내밀고서야 그가 조금 언짢은 얼굴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미안. 못 들었어. 모험가의 사과는 짧았다.
"됐습니다. 시덥잖은 이야기였어요."
눈을 뜨면 보이는 건 새까만 암흑 뿐이다. 이따금 그의 감정이 물결처럼 흘러들어오고, 그의 상념만이 조곤히 바닥에 가라앉던 공간에 나는 있었다. 이번에도 그러리라 여겼다. 그는 피곤에 찌든 몸을 겨우 끌어 뉘곤 잠을 청했다. 그의 수면은 곧 나의 수면이기도 해서, 발 밑에서부터 가물가물 올라오는 검정에 삼켜진다. 잘 자. 나의 주인. 속삭이는 건 버릇이다.
이번에는. 갈색이 보였다. 문득 벌떡 일어난다. 차갑고 딱딱하기 그지없던 바닥에 무언가 파스락거렸다. 낙엽. 이곳저곳 떠도는 게 익숙한 그는 겨우 낙엽을 그러모아 습기를 면하고는 했다. 혹시 나는 또 그때처럼 누군가의 몸에 깃든 건 아닌지. 마침 곁에 있던 호수로 걸음을 옮겼다. 다리가 삐걱거렸다.
아니, 아니다. 기억하던 그의 모습이었다. 분명히 이건 주인이다.
도대체 뭐 하려고 쓴 문장인진 모르겠는데 일단 킵
나는 빛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기 마련이라, 내 속에 암흑이 자라났다.
이슈가르드는 생각만큼 추운 곳이다. 생각만큼 춥지 않기도 하고. 올라선 건물은 대부분 돌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한기를 느끼기에는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적합하지. 신발 아래로 냉기가 스미는 착각이 일었다. 구름 안개거리에 해가 제대로 드는 날은 없다. 애초에 커르다스가 볕이 잘 들지 않는 지역인데, 항시 흐린 그늘 아래에 자리하는 거리에 빛이 드는 일은 없겠다. 그런 곳에 종종 발을 옮기는 일은. 보통은 하지 않는다. 이슈가르드는 변하고 있다지만, 고착화된 문화가 삽시간에 바뀌는 일은 없으므로. 그러니 그곳 사람들은 항상 내게 적대감이 가득한 눈길을 보낸다. 그런, 눈빛에 무뎌진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거기에는 그가 있다. 앉은 다리 위에 대검을 얹고 조용히 손질이나 하고 있는 그가 있었다. 그는 내가 당신을 눈에 담기도 전에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눈이 잘 안 보여서. 야릴 수도 있다. 미안. 그는 그런 말을 하며 웃었다.
여기서부턴 2019년이네용
그 날은. 타람이 유독 불안해했다. 그는 감정을 숨기는데에 능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의도하지는 않은, 무의식에서 흐르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나는 읽는다. 그의 눈길이, 그의 손이, 유독 갈 곳을 잃어했다. 그가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건 여간 흔한 일이 아니다. 마치, 그건 승전 축하연이 끝나고, 찾아온 날의 그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을 거야.
뭐가? 그가 눈으로 내게 물었다. 뭐가. 그 갈색 눈이 그렇게까지 절박해보인 것도 처음이었다. 너무 긴장하지 말아. 우리는 아이메리크 경을 무사히 구출하고, 부상 없이 모두 돌아갈 수 있어. 나는 그를 보며 웃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웃지 않았다. 그렇. 겠죠. 그가 중얼거렸다.
거짓말이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누군가가 널 노릴 거란 것도. 함께 달려가던 나는 당연히 네 뒤를 지켰을 것도. 그 창이, 생각보다 훨씬 견고해서 내 방패를 뚫고, 나도 꿰뚫릴 거란 것도. 나는 그 자리에서 숨이 멎을 것도. 알고 있었다, 말하지 않았다.
그의 수면이 유독 얕아졌음을 눈치챈다. 얽매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주변을 맴도는 것 뿐이다. 말은 나오지 않았다. 부스스 일어난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잘 잤어. 그러나 그는 곧 허리를 접어 숨죽여 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는 잊는다. 잊고 싶었다. 된다면 벽에 내 머리를 들이받고 싶었다. 피부가 벗겨지고 두개골이 깨져 뇌가 뭉개져 이윽고 내가 누군지 잊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죽은 눈들이 내 그림자에 기생하고 있었다. 가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오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차라리 바닥에라도 꺼지고 싶었다. 허락되지 않았다.
흉내라고 낸 게 지금 이 짓이다. 힘은 남아 있지만 딱히 끄떡거리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얼어죽고 싶었다. 들었어? 그 새벽의 모험가가 말이야, 커르다스 중앙고지에서 얼어 죽은 채 발견됐다지 뭔가… 그런 식의. 가십거리가 된다면. 괜찮을 것도 같은데. 웃음은 나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너는 슬퍼하겠지.
일어난다. 몸 위에 쌓여 있던 눈이 후드득 내린다. 피부에 닿는 바람이 살갗을 찢을 것 같았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피부가 홧홧했다. 비명이라도 지르는 것 같았다. 천천히 일어섰다. 움직인다.
그는 알고 있다. 내가 잠이 불규칙한 사람이라는 걸. 저만큼이나 일찍 용머리 전진기지의 아침을 맞이하지만 전진기지에서 가장 찾기 힘든 사람임을. 숨이 벌겋게 번진다. 눈앞이 조금 흐렸다. 나는 그만큼 올곧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만큼 반짝이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네가 싫어. 날 보며 웃는 당신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당신의 웃음을 보다보면 나도 모르게 웃고는 했으니까. 눈이 부서졌다.
바스락거리는 숨을 삼켰다. 바람소리 사이에 울음이 섞여 있었다. 기분탓이었다. 기분탓이어야했다. 걸었다. 오는 길에 몇 개인가 죽은 양을 봤다. 양들은 어딘가 뜯겨나간 채 썩어가고 있었다. 전진기지에 있는 가축은 아마도 초코보 뿐이다. 갈 곳이야 있지만, 만들면 되지만 나는 습관처럼 여기에 온다. 그렇게 풀이 죽은 알피노나 불안해하는 타타루가 눈에 밟혀서.
하지만 그가 내어준 곳에 선뜻 발이 가질 않았다. 나는 불청객같았다. 그들이 날 웃으며 대하더라도 나는 늘 불편했다. 그래서 나는 굳이 네가 눈의 집이라고 한 곳에 들어간 적도 없었고 다른 이들의 눈에 띄고 싶지도 않았고…
"메이아!"
눈이 돈다. 오르슈팡. 그 이름이 입 속에서 맴돌았다. 오르슈팡은 퍽이나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리 뛰어왔다. 나는 웃지도 않았다. 된다면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의 장화가 움직이는 소리가 그렇게나 멀었다. 그가 웃고 있지 않았다. 당연한 게 아니었다.
"…잠깐, 너…."
오르슈팡은 절걱이며 다가왔다. 완갑을 굳이 벗어 내 뺨에 대었다. 그는 자신이 상냥하다는 사실을 모른다. 차가운 손이 뺨에서 이마로 오른다. 그의 얼굴이 점점 색이 가시는 걸 보고만 있었다.
"세상에. 도대체 어딜 다녀온 거야! 불덩이잖아."
잠깐 죽고 싶었어. 나는 말하지 않는다. 오르슈팡이 내 손목을 잡아 이끌 때도. 아주 자연스레 응접실로 이끄는 그의 뒤에서 멈춰설 때에도. 그가 날 돌아봤다. 나는 그의 허리 언저리를 보고 있었다, 그가 굳이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춰줘도 시선을 들지 않았다. 말을. 하려 했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가 익숙해졌을 거라 생각했다. 이내 발길이 날 스쳐지나갔으나 붙들린 손목에 끌려갔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새삼스레 전진기지에 와보지 않은 공간이 있었다. 날 들이고 문을 닫은 당신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쉴 때는 여기서 지내. 주어가 없었다.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불편해?"
"응?"
"넌 여기 오고 나서 가만히 있질 못하잖아."
무언가 더 말하려 했던 것 같다. 그가 열었던 입을 도로 다물었다. 해야하는 말, 해도 되는 말,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 하면 안 되는 말. 그는 그런 것들을 쟀다. 나는 그저 그를 보고만 있었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었나.
자주 있는 일이다. 그러나 자주 있는 일이라고 늘 익숙하지는 않은 법이다.오르슈팡은 묵묵히 제 팔을 내려다보는 타람을 보고 있었다. 타람이 어디선가 다쳐서 돌아오는 일은 꽤 잦다. 알피노에게 물으니 전보다 부상의 강도가 높다고 했다. 그는 제 팔에서 뼈가 긁히고, 신경이 얽히는, 그런 과정을 보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뜬 눈으로. 하기야 빛의 전사니 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지나가던 병사가 넌지시 말했다. 오르슈팡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수고했네. 들어가서 쉬도록 해. 그가 의료병에게 한 말이었다. 타람은 연금술사와 눈을 맞추고 고개를 한번 끄떡거린 후론 오르슈팡을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르슈팡이 그를 내보내고, 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히기까지. 오르슈팡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부딪쳤다. 오르슈팡이 고요한 갈색 눈에서 읽은 감정은 의아함이었다. 왜 안 나가. 오르슈팡은 그만 죽은 숨을 삼켰다. 타람은 누군가와 오래 눈을 마주하지 못한다. 먼저 눈길을 돌린 건 타람이었다.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푹 쉬고 싶다면 나가줄게. 타람은 가만히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가 아예 말하지 않았다는 것처렁. 오르슈팡은 끓는 말들을 겨우 삼켰다. 그래. 알았어. 그가 일어서려 할 즈음이었다. 타람의 손이 올라와 그의 팔을 잡았다.
"미안해요."
짧은 말이 샜다.
"나. 당신의 손. 잡아도 돼요?"
"뭐?"
"거절해도 괜찮아요."
손이 차다. 그건 맞잡은 그의 손이 차가워서다. 그의 손은 뼈처럼 가늘고 말랐고 딱딱하고 건조하고 사늘했다. 구멍 뚫린 손바닥으로 바람이 새어들어와서 그런 듯도 하다. 내가 찰박이는 동안 그의 발은 소리도 내지 않았다. 흘긋 그를 올려다봤다. 아마 그는 언다인이나 파피루스보다도 크다. 길게 늘어진 광택없는 천 근처에서 손이 하나 둥둥 떠다녔다. 그의 입은 곡선을 그렸으나 딱히 웃는 것 같지는 않다. 건조한 미소.
워터폴은 어두운 곳이다. 오로지 야광버섯과 메아리꽃의, 강의 빛에 의지하는 곳. 그는 반쯤 감은 눈으로 걷고 있었다. 아니, 걷는다고 해야하는 게 맞을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의 발길은 엷었다.
나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그가 그걸 인지한 후부터는 나에게 말하지 않았다. 눈길이 마주친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시선이 닿으면 그는 그저 잠시 멈춰섰다가, 다시 스르륵 움직인다. 그가 내 걸음에 맞추는지, 그가 나와 같은 걸음인지 나는 잘 몰랐다.
물방울 소리가 났다. 나는 문득 그가 울고 있는 듯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착각. 알 수 없었다. 물길이 처벅거렸다. 걷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걸었다. 샌즈의 초소가 눈에 들어왔다. 지나치려 했는데, 그가 우뚝 멈춰 서서 따라 멈췄다. 고개를 들었다. 그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손목 없는 손이 움직여 초소의 책상 위를 훑었다. 쓸었다. 책상에 검은 물이 묻었다.
"샌즈. 불러 줄까요?"
그가 천천히 고개를 내게로 내린다. 그의 눈은 불투명하다. 그는 말없이 날 보다간 다시 초소를 봤다. 샌즈. 나는 중얼거렸다. 샌즈. 와 봐. 나는 샌즈를 불렀다. 파란 불빛이 나타났다.
"그으래, 꼬맹아. 핫도그라도 줄,"
까.
라고 하려 했던 것 같다. 샌즈는 웃고 있었다. 웃고 있지 않았다. 굳은 웃음같았다. 아팠다. 그가 내 손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몸을 웅크렸더니 그는 흠칫 힘을 뺐다. 가스터. 목소리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당신이 어떻게…."
구멍 뚫린 손이 샌즈의 두개골을 쓸었다. 그리고 부서졌다. 허억.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샌즈. 아는 괴물이야?"
"허? 어. 그럼. 알고 말고."
"누구야?"
"가스터. 내 아버지야."
네게 아버지가 있었다고? 나는 시선을 든다. 가스터, 라는 괴물의 기분이 썩 좋지 않은 것만 알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언짢은. 표정이 바뀐 건 아니었지만 그랬다. 길고 마른 손이 샌즈의 입을 꾹 눌렀다. 읍.
"맞잖아요. 당신이 나와 팝을 길렀지."
가스터. 라는 괴물이 소리없이 한숨을 쉰 것도 같은데. 샌즈가 불안해보이는 건 처음이다. 그는 태연한 체 턱을 괴고 있었으나 눈길이 묘하게 겉돌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어쩐 일이고요."
눈이 마주쳤다. 검은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허공에서 손이 하나 더 피어올랐다, 마치, 꽃. 하늘하늘한 물고기. 지느러미. 꼬리같은 것들. 샌즈는 가만히 가스터의 손길을 좇고 있었다. 흐으음, 문득 샌즈의 눈길이 멎은 듯 보였다. 어느 정도 안정된, 긴장이 풀린 눈. 뭐 좀 물어볼까, 꼬맹아? 샌즈는 씩 웃었다, 하기야 늘 웃고 있기는 했지만. 끄덕였다.
"어디서 만났어? 이 괴물."
"워터폴."
"어엄청 의외인걸."
똑똑똑. 그의 차갑고 굳은 손가락이 샌즈의 두개골을 두드렸다. 마치 나무라는 것처럼. 샌즈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괴물들은 당신을 보면 기절이라도 할 걸요."
지직거리는 괴물이라니. 썩 끔찍하죠. 가스터. 의 움직임이 멎었다. 고요했다. 동굴의 구멍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엷고 긴 소리였다. 문득 가스터는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나는 귀를 대었다. 바람 섞인 목소리가 흐렸다.
안아올려도 될까? 당신을. 내가.
나는 끄덕인다. 그가 얕게 웃었다. 이제껏 뒷짐을 지던 팔이 다가오는 걸 보고 있었다. 그건 팔이라기엔 아주, 아주 얇았다. 길고 큰 소매에 가려질 때부터 가느다래보인다고 생각은 했으나. 퍽이나 조심스러운 손길이 몸을 감쌌다. 시선이 아주. 높았다. 와. 짧은 감탄사가 들렸다. 샌즈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놀라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꼬맹아. 너 뭐 했니? 갸우뚱거렸다.
"가스터는 원래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괴물이야. 하지만 네가 존재하게 해주는 것 같은데."
"몰라. 그냥 이 사람이 도와달라고 했어."
뒷통수를 무언가 톡톡 건드렸다. 아마도 손가락같은. 나는 돌아봤다. 그가 소곤거렸다.
친절하군요. 너같으면 좋을텐데. 모든 인간이.
시즈오.
그도 결국엔 인간이다. 인간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참했다. 똑같이 괴물인 네가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게. 나랑 같은 괴물인 주제에.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날 두고 당신은 사랑받겠지.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당신을 괴물로 몰아세우고 모두가 당신을 두려워하게끔. 오로지 나만이 당신과 눈을 맞출 수 있고 나만이 당신과 대화할 수 있게. 나만.
합리적이지 않아. 나는 당신을 싫어하고 싶었다. 어쩌지? 당신이 좋았다. 당신이 미치도록 증오하는 나는 당신을 좋아했다. 물론 인간으로서지만, 당신이 괴물이면서도 인간이었기에 그랬지만, 그래서 나는 인간이자 괴물인 당신을 사랑했다. 당신이 그렇게 죽이고 싶어하는 내가 당신을 사랑했다. 당신은 폭력을 싫어해. 하지만 내게만은 그렇게 모질다. 기뻐? 응.
나는 살아야했다. 당신의 손에 죽기 위해서. 네가 날 죽이게 하도록.
하지만. 폭력을 싫어하는 네가 내 죽음을 견딜 수 있어? 시즈오.
*
생각해보면 나름 귀여운데. 어지간한 사람들은 시즈를 잘 모른다. 시즈는 사실 평온한 사람이다. 끓는점이 지나치게 낮은 게 문제일 뿐이지. 하여간 시즈는 성을 죽일 필요가 있다. 내가 그렇게 만든 책임도 있긴 하니 내가 할 말은 아닌가. 뭐 어때. 시즈는 내게 듬뿍 사랑받고 있다. 그럼 됐어. 사랑해, 시즈. 오늘도.
의자를 돌려 일어났다. 커피는 맛있다. 하지만 오래 마시면 물리는 법이다. 하루 정돈 다른 걸 먹어볼까, 그래, 샌드위치같은 것도 괜찮을 거야. 혼자 고개를 끄떡거리곤 발을 돌렸다. 겉옷을 대충 걸치고 방을 나섰다. 문명은 참 편리해, 문이 알아서 잠기는 소리가 났다.
한낮. 이케부쿠로는 생각만큼 한적한 곳이 아니다. 눈에 띄게, 보이지 않도록 수상한 움직임이 있는 곳. 이케부쿠로였다. 사람이 많은 건 구역질이 났지만. 후덥지근한 바람이 분다. 아침의 햇살은 적당하게 노곤하고 적당히 날카롭다. 딱, 불투명한 커튼처럼 수마가 살며시 다가오는 정도의 사늘하고 미지근한 분위기. 하지만 난 턱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졸리지는 않았다. 제과점에서 산 샌드위치를 씹고 있었다. 양상추는 흐물흐물하고 계란도 뻑뻑하기 그지없는. 다신 안 사야지. 그런 시시껄렁한 생각을. 했다.
"시즈으!"
흠칫, 하고 커다란 실루엣이 떨었다. 너는 정말 나를 기쁘게 해, 네 경악 어린 표정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너는 모를 거야. 반가운 나머지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더니 그랬다. 나도 나지만 그렇게 소리를 잘 지르는데 목이 안 쉬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도 내 탓인가? 그건 잘 모르겠는데.
"이자야…!!"
아이 참. 몸만 빙 틀어 날아오던 우체통을 피했다. 나 아침 먹는 중이잖아! 너무해, 시즈! 물론 난 네 그런 과격하고 무식한 행동을 전부 사랑하지만. 알 게 뭐야, 벼룩놈아! 너는 그렇게 서슬퍼렇게 외치곤 펄쩍펄쩍 내게로 뛰어온다. 에구. 오늘 밥은 얹히겠어. 마지막 한 입을 구겨넣곤 건물 사이를 뛰었다.
"너무해, 난 아직 아무것도 안 했잖아! 난 그냥 네가 반가워서 인사한건데-."
"나한테는 헤이와지마 시즈오라는 멀쩡한 이름이 있다고,"
우지끈,
"어?"
"몇 번을 말하냐!!"
어, 어라. 진심인가? 팔에 작은 벌레가 빠르게 기어올라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땅이 으적으적 갈라지더니 철근 몇 개가 달린 블록이 눈에 들어왔다. 시즈, 이제 하다하다 콘크리트를 맨손으로 뜯는 지경까지 간 건가. 정말 괴물이 따로 없다. 이건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래도, 나는.
네가 내게 이렇게 동요한다는 게 이다지도 기뻐서. 그만 웃었다.
물론, 너는 그걸 내게로 던지며, 미워 죽겠다는 것처럼, 죽어! 라고 하기는 했다만.
당신은 가끔 조용했다. 아니, 사실 당신은 늘 조용하긴 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웃지 않곤 했다. 당신은 이따금 고요히 골몰했다. 마치 어딘가에 잠긴 것처럼, 숨도 쉬지 않는 듯이 가만히 있었다. 늘 건조하게 웃던 당신은 그때 유일하게 웃지 않았다. 당신은 그저 그렇게 있었다. 나는 당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기다렸다. 당신의 상념이 끝나기를. 무언지 모를 당신의 생각이, 실타래가, 당신이 품은 의문이 풀리길 기다렸다. 당신이 멎는 일은 늘 갑작스러웠다. 당신은 걷다 말고 뚝 멈추기도 했고, 샌드위치를 문 채로, 심지어는 차를 따르다가도. 그때 뒷수습은 오로지 내 몫이었고, 당신은 내가 당신의 구멍난 손에서 포트를 걷어내고 홧홧하게 갈라진 당신의 손에 물을 부어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굳어버린 것처럼. 갑자기 당신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당신을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면 당신은 언젠가 홀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웃었다. 샌즈. 재밌는 게 생각났습니다. 들어보겠어? 당신은 그렇게 중얼거린다. 나는 안다, 그건 권유가 아니었다.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건 당신이기 때문이다. 당신이니까 수긍할 수 있는 일이다. 당신이 거의 늘 이론을 세우고 있단 걸 알았다. 당신은 거의 항상, 누군가와 대화를 하면서도 당신의 가설에 대한 근거를 찾고 있었다. 그래서 납득했다.
그래서. 나는 걱정스러웠다.
"비켜, 샌즈."
"가스터, 좀 진정해요."
"안 죽여. 그럴 순 없지. 길게. 아주, 길게. 나쁜 시간을 선물하려는 것 뿐이야."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요."
"우연히 쏜 레이저가 하필 나한테 맞았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가스터가 화내는 일은 없었다.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태어나고 이제까지 본 그는 언제나 평온했으므로. 가스터는 언제나 손으로 말했다. 당신이 손을 움직이면 난 먼저, 그게 그저 아무 의미도 품지 않은 행동을 위한 손짓인지, 뜻을 담은 체계적인 흐름인지 파악해야했다. 당신은 말을 하지 않는 거랬지, 말을 할 수 없는 건 아니라고 했다.
궁금한가요? 내 목소리가. 당신은 웃고 있었는데, 어쩌면 한편으로 즐거워보이기까지 했었다. 으. 아니요. 그러면 당신은 내 머리에 다른 손을 얹었다. 두개골에 닿는 당신의 손이 차갑고 딱딱하고 퍽이나 조심스러웠다. 아쉽게도. 그러면 아주. 성가신 일이 생기거든요. 당신이 중얼거렸다.
그랬다. 당신은 그때처럼 웃고 있었는데, 웃는 것 같지도 않았다. 처음 들은 당신의 목소리는 정말 낮고, 무거웠다. 마치 흐르듯 건조하고 평탄한 억양이었다. 하지만 노기가 뚝뚝 묻어나오고 있었다.
"아니면, 함께하고 싶니? 너도."
당신은 고요하게 물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뒤의 연구원이 고장난 인형처럼 울고 있었다. 잘못했어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죄송합니다….
당신은 혀를 찼다. 뒤에서 바람이 일었다. 고개를 돌리는 사이 무언가 처박히는 소리가 났다. 쿵도 아니고 쾅 정도의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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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너는 늘 얼룩이 져 있었지. 너는 늘 같잖은 밴드나 붕대나 파스 따위를 덕지덕지 붙이고 헤슬 웃었다. 난 네가 어디서 구르기라도 했겠거니, 하고 말았다. 실제로 너는 공부를 한다기보다는 체육 쪽으로 진로를 굳힌 것 같았고. 그래서, 너와 내가 대화를 할 순간은 쉬는 시간의 5분쯤, 점심시간, 저녁시간동안 아주 조금, 하교시간 정도였다. 굳이 보태자면 등교도. 실은, 나는 굳이 집 앞에서 자전거를 세운 채 기다리는 너를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그냥 그러려니 어울렸다. 내가 문을 나서며 보는 너는 늘 녹아내리듯 웃고 있었다.
나는 어쩌면 익숙해져 있었다. 넌 표현에 거리낌이 없었다. 좋다느니 하는 소리를 스스럼없이 하고는 했다. 그때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네 등에 머리만 비볐다. 그럼 너는 또 까르르 웃었다.
주변 사람들은 나와 네가 왜 친구인지 몰랐다. 사람은, 비슷한 사람과 어울리게 된다. 맞는 말이다. 나와 네게 공통점이 있다면, 부모님이 우리에게 소홀했다, 정도 뿐일 것이다. 나는 움직이기보단 가만히 있기를 좋아했고, 너는 가만히 있느니 천방지축 쏘다니는 걸 좋아했다. 나는 고요를 원했고 너는 소란을 원했다. 그렇지만 난 너를 기억에서 지운 일이 없었다.
사실, 나는, 네가 왜 날 여즉 붙잡는지 모른다. 너는 사교성이 좋았다. 처음 본 사람과도 금방 말을 트고 웃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너는 굳이 나를 찾았다. 난 성격이 썩 좋은 사람도 아닌데. 하지만 눈이 마주치면 꼭 웃는 네 얼굴에 뭐라고 말을 붙일 수도 없었다. 말은 썩어갔다.
너는 주말이면 이따금 내게 영화를 보자고 했던 것 같다. 주로 슬픈 것들. 눈물이 나올 법한 영화들. 우는 법을 잊은 나는 화면을 건조하게 보고만 있었다. 너는 자주 울었다. 하지만 이제야 생각하면 너는 슬프거나 감동이 오지 않을 법한 장면에서 울었던 것 같은데. 아니, 그때 너는 오히려 스크린조차 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집중하고 있었다면, 진실로 몰입하고 있었다면 나와 눈이 마주치지도 않았을텐데….
프레이는, 기억한다. 하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까지 강인하지 않다. 누구보다도 건조한 그는 사실 지나치게 여렸다. 그는 옛적에 표현을 잊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생각을 했다. 생각만 했다. 프레이는 그가, 나름대로, 오래 고민했으리라 여긴다. 제 팔을 쥔 그의 손이, 약 일분 여갼 걷는 동안 떨리고 있었기에. 문을 열면 조금은 습기어린 내가 난다. 먼지의 텁텁한 내음, 앓는 소리, 바닥에 깔린 알코올의 향. 잊힌 기사 주점은 그런 곳이다. 프레이는 저를 이끄는 모험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계단을 안 타고 바로 뛰어내리는 그 고약한 습관에만은 참견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
네가 있었다. 네가 아니겠지. 여기 경찰들은 하도 똑같이 생겼다. 나는 그래서, 유독 너를 닮은 경찰을 봤다고, 그렇게, 널 보고 웃으려 했다. 아니었다. 아니었다, 나는 누군가 네 이름을 부르는 걸 들었고, 그 인영이 부름에 응하듯 고개를 돌리는 걸 봤다. 아주 똑똑히. 그건 너였다. 멍청한 안대를 두르고 그 거지같은 모자와 옷을 입은, 그건, 너였다.
울었나. 아니. 나는 우는 법을 잃었다. 무슨 기분이었지?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은 일시적이어서 부글거리며 침전한다. 혼란은 점차 고요해지기 마련이다. 내 공간은 언제나 정적이었다. 회전도 결국엔 잦아들기 마련이다. 말라버린 눈물이 뚝 끊기기만 했다.
이해. 이해?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그들에게 선 너를 이해할 수 있지. 내게서 멀어진 너는 언제부터 그 개들의 일부가 되어 있었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었다.
펑, 나날이 무언가 터졌다. 얼굴에 튄 검댕을 대충 닦는다. 무엇이 문제였지. 부품이 잘못 되었나. 어딘가 연결이. 연료가. 가능성은 거의 무한에 가까웠다. 실소가 새었다.
"왜 그렇게 봐."
너는 내가 미친 사람 같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고양이가 조용히 날 보고 있었다. 저 애는 요즈음 자주 왔다. 작업을 하고 있자면 어느 순간엔가 창틀에 앉아 있었다. 인간 하나가 끼릭끼릭 멍청한 짓을 하는 게 뭐가 재밌다고. 나는 줄 것도 없는데.
안녕.
너는 웃는다. 내가 널 반길 거라고 확신하듯. 내가 널 싫어할 리 없다는 것처럼. 나는 기꺼이 너를 맞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돌아선다. 잠깐만, 네 목소리에 웃음이 스며 있었다. 너는 내 모든 행동이 장난으로 보이지. 나는 굳이 말하지 않는다. 타닥이던 너의 걸음이 내 곁에서 터벅일 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걷는다. 그저. 걷는다.
익숙해졌나. 그래, 익숙해졌다고 할 수도 있겠다. 누군가를 저주하는 일에도 익숙했고 누군가의 저주를 받는 일에도 익숙했다. 나는 언제나 울고 싶었다. 누군가의 원망 어린 눈길에 같잖은 상처를 받기도 몇 번, 누군가가 웅얼거린 말들에 동정을 느기기도 몇 번, 누군가의 폭력스러운 말에 무기력을 느끼기에도 몇 번… 하지만 나는 익숙해져야 했다.
그러니, 나는 지금 네가 그런 얼굴로 있는 것에도 익숙하다. 익숙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익숙할 수도 없었다. 익숙해야만 했다.
"농담이지."
"나도 그러기를 바라."
네가 웃는다. 나는 웃음이 여러 의미를 담을 수 있다는 걸 안다. 나는 네 얼굴에서 감정을 읽는다. 경멸감. 나는 가끔 내 눈이 멀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터무니없는 생각들이 뇌를 갉고 지난다. 너는 그저 우두커니 서 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너를. 아니, 아니겠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쿠이나. 온몸이 굳는 기분이 들었다. 손가락만 겨우 움찔한다. 제발 날 그렇게 부르지 마. 속삭임은 낮다.
네 얼굴을 겨우 봤다. 못 볼 걸 봤다는 듯한 눈. 혼란스러운 사람. 딱 그 정도였다. 나는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꿈이었다. 나는 알아차린다. 네가 웃자마자 깨닫는다. 너는 죽었다. 나는 살았고.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은 꿈이다. 내 눈앞에서 살갑게 웃는 너는 내 꿈이다. 늘 그랬듯 눈을 빛내가며 웃는 넌 꿈일 따름이다. 나는, 그래서, 문득 너를 안았다. 너는 호들갑을 떨다가 이내 잦아든다. 나는 그냥 너를 안았다. 세게, 더 세게.
메이아?
흠칫 떤다. 그는 눈을 끔뻑이며 날 보고 있다. 절걱이는 군화가 거슬렸다.
하이델린. 나는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어. 하다못해 내게서 당신의 가호를 앗아갔으면 좋겠어.
[히카프레히카] 심연
삼켜도 괜찮아. 중얼거렸다. 내 전부가 되어도 괜찮은 너는 상냥해서 그러질 않는다. 나는 정말 괜찮아. 아니면 너도 내가 되긴 싫은지도 모르지. 내가 떨어져내릴 무렵 너는 내 발치에 있다. 아주 가까이에 네가 서 있었다. 둘라한, 나는 그런 시체를 자주 봤다. 그래서 익숙했다. 하지만 낼 수 있는 소리라곤 쩔걱대는 철판 뿐인 네 말을 알아들을 방법이 없었다. 네가 이 수를 항상 싫어했다. 왜 안 돼. 너는 나라며. 내가 너고 너도 나라면, 똑같지.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안 웃겨. 난 널 죽여가면서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아. 너는 언짢은 듯 말했지만 사실은 안다. 네가 나보다도 간절히 내게 닿고 싶었음을. 너는 나보다 훨씬 더 솔직했다. 눈빛을 못 감췄었지. 네 눈에 머무르던 열기가 금세 사그러든다.
왜 또 온 거야. 네 목소리가 걱정에 젖어 있었다. 알잖아. 여긴 춥고, 외롭고, 고통스러워. 너는 웃을 줄도 알았구나.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그게 비록 긍정적인 미소는 아니었지만. 그럼 너는. 있어도 돼? 네가 눈을 찌푸리다가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난 이제 따가운 눈빛 정도는 아무렇지 않은데. 고개를 숙였다가, 들면서 입을 가렸다. 골치가 아픈 사람들이 으레 하던 것처럼. 난 네 어두운 부분이지. 어쩔 수 없어. 네가 낮게 말했다. 괜찮다고는 하지 않는다. 너는 내가 맞다.
그냥 네가 보고 싶었나봐. 말한다. 네 눈이 조금 커졌던 것도 같은데. 하지만 너는 웃지 않는다. 그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너는 좀처럼 내게 닿지 않았다. 어떤, 금기처럼. 그러니 네 손이 내 어깨를 붙잡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잖아. 네 손이 더 세게 죄였다. 네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돌려줄게. 오래 있어서 좋을 게 없는 곳이야. 네가 사라지는 건 순간이다. 텅 빈 갑주. 무언가가 목덜미를 잡아 끌었다. 네가 어깨를 놓고 있었다. 시야에서 네가 사라졌다. 대신 푸른 여명이 보였다.
항상 그랬다. 널 보러가면 너는 늘 나를 다시 내쫓지. 기억하라고 했을 땐 언제고. 일어난다. 머리가 아팠다.
***
휘청이는 몸을 나무 줄기에 들이박았다. 쓰러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탓이다. 하지만, 역시, 아픈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주르륵 미끄러져 앉는다. 빌어먹을 하이델린, 빌어먹을 사람들, 빌어먹을 마물들… 후들거리는 손으로는 도로 창자루를 쥘 수도 없었다. 시체에서, 그리고 그들로부터 나온 피를 뒤집어 쓴 몸뚱이에서 역한 내가 났다. 토하고 싶다. 하지만 먹은 것도 없는 속에서 무언가 올라올 일은 없었다. 익숙하기도 했고.
커르다스, 그것도 서부고지는 얼어붙은 곳이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니길 꺼리는 곳이었다. 일부 용병이나 신전기사들, 혹은 생업의 문제로만 인간이 오가는 지역이다. 그래서, 여기에 굳이 의뢰때문에 찾아오는 모험가도 있었고, 그러다가 예상치 못한 용의 습격으로 죽는 경우도 잦았고… 역으로 용을 죽인다고 치더라도 지쳐 얼어죽는 경우도 있었다. 겨우 나무에 손톱을 박고 일어섰다.
당장 죽어도 상관 없다. 나는 죽어도 괜찮은 사람이다, 어쩌면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모든 생물은, 생명은 본능적으로 생을 갈구한다. 의식과 무의식은 다르다. 내가 의식적으로 죽음에 손을 뻗더라도 내 무의식은 다리를 붙잡고 놓지 않을 수도 있는 거고… 불행하게도, 다행스럽게도, 나는 나의 무의식을 안다. 죽음을 부정할 너를 알아.
부스럭거리며 지도와 나침반을 꺼냈다. 원래는 여기쯤에 있었는데, 용이 질기게도 날아 이상한 곳에 왔다. 몇 미터 정도 날았지? 나는 그런 걸 재는 것에는 영소질이 없었다. 이런 곳에서 호루라기를 불기에는 밀에게 미안하고… 한숨은 썩 깊다.
무작정 걷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지 잘 안다. 그렇기에 멈춰 있었다. 오늘의 서부고지는 생각보다 상냥하다. 하지만 언제 눈보라가 칠지 모른다.
나는 영웅이 아니었다. 아니어야 했다. 알량한 책임감, 애매한 정의감으로는 영웅이 될 수 없다. 나는 내가 호의적인 존재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분명히 알고 있었다. 폐에 시리게 꽂히는 흰 냉기가 지나치게 날카로워 기침이 나올 것 같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는데. 내 눈물이 진작에 말랐을 줄은 또 몰랐지.
너를 사랑해. 그건 진심인가. 진심은 아니다. 내 사랑은. 내가 사랑했던 존재들은 오두 사라졌다. 스러졌다, 재해의 희생양으로, 정치의 장기말로, 세계의 부름으로, 혹은, 나, 때문에.
나는 영웅이 아니었다. 내가 구한 사람이 수만수천이더라도 내가 죽인 사람도 수천수만 명이었다. 구원에는 희생이 있다. 죽어 마땅한 사람은 전부 죽는가. 죽는 사람은 전부 죽어 마땅하다고 할 수 있는가. 정말로. 내가 죽인 그 모든 목숨들이 죽어마땅했나. 내 살인은 정당화될 수 없다.
여기부터 2019년이네요
그는 늘 그랬듯 거기에 서 있었다. 흰 숨이 허공에 흩어진다. 나는 그걸 잠시 가만히 보다가 서벅 발을 옮겼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돌린다. 그의 흐린 눈을 잠시 보기만 했다. 눈을 찌푸리던 그가 이내 다가왔다. 숨이 차가웠다… 그의 바랜 붉은 손이 올라와 머리카락을 스쳤다. 덜미에 언뜻 닿았던 손가락은 얼음같았다.
"뭐야. 너였냐."
그는 중얼거리듯 말한다. 그제야 그는 인상을 풀었다. 나는 그를 보고만 있었다. 뭐. 그가 입을 벙긋거렸다.
"당신. 안 추워요?"
"거, 더럽게 추워서 뒤질 것 같지. 왜."
"나랑 가요. 가 줘요."
* 그때에도
1.
이슈가르드의 여관은 썩 좋은 편이 아니다. 그야 그렇지, 잊힌 기사 주점은 오래 되었지만 그만큼 어느 정도 낡았다. 먼지가 조금 날리는 방. 낡아보이는 카페트, 조금 쉽게 꺼지는 매트리스. 그런 것들이 방을 채우고 있었다. 푹신한 침대라고 말은 하지만 글쎄, 정말 그런지는 잘 모른다. 데운 싸구려 술. 데운 우유. 그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곤 벌컥벌컥 잘도 들이켠다. 숨 막히겠다.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아, 써!"
"쓴 걸 좋아해요?"
"아니."
"그럼 왜 마셔요?"
"춥거든."
습관이야. 그는 잔을 금세 털어버리며 말했다. 몸을 데우는 데는 술이 직격이긴 하지만 그래도 되는가. 고개를 갸우뚱거렸으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머그잔의 손잡이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래. 왜 왔어."
"이유가 있어서 오던가요?"
"뭐든 뭐가 있으니 왔을 거 아냐."
"나는 그냥 온 거예요."
"사람 찾는데 그냥이 어딨어?"
헛소리 작작해. 끓는 소리가 뒤엉켜 있었다. 그는 그래도 목을 가다듬거나 하지는 않는다. 타닥이는 모닥불 소리가 낯설었다. 익숙했다. 불이 타는데도 실내는 서늘했다. 고요했다. 바람소리가 거칠었다.
"이거 얼마든."
"2400길?"
"염병하게 비싸네."
커르다스는 추운 곳이다. 무언가를 발효하기에는 마땅찮은 기후, 환경. 그런 곳에서는 술이 귀하다. 아니, 모든 음식이, 모든 물건이. 귀할 테다. 이슈가르드의 물가가 다른 국가보다 꽤 높은 건 그런 이유에서이리라. 빈부 격차가 확연한 도시임에도 물가는 높다니. 어딜 가나 썩은 사람들은 있었다.
"내가 내줄게요."
"꺼져. 너 그러다 내 장기 털려고 그러지."
"내가요?"
그의 말은 반쯤은 농담이다. 그러나 반은 농담이 아니었다.
"내가 끔찍한 짓을 할 것 같아요?"
"난 너도 못 믿어."
"안 믿는 거죠."
그의 손이 멎었다. 나는 그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입안에 흐르는 우유는 고소하고… 아주 조금. 비린내가 났다. 그래, 말 나온 김에 묻자. 그가 잔을 내려놓았다.
"너. 나한테 왜 이래."
나는 안다. 그의 눈이 옅은 불안을 품고 있었다. 일렁이는 붉은 빛이 그의 눈에서 떠돌고 있었다. 흰 머리카락이 붉게 조각났다. 들리는 소리는… 딱히 없다. 소란한 바람소리가 이따금 창을 스쳤고, 불씨가 몸을 뒤척였다. 나는 그저 가만히 당신을 보고 있었다. 눈이 몇 번 깜빡거렸다. 나는 당신이 생각보다 침묵에 익숙하지 않다는 걸 안다. 그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개새끼.
"당신이 날 도왔잖아요."
"미친. 저번에 그거냐? 그걸 도대체 몇 배로 주는건데."
"글쎄. 모르겠는데요."
"야, 고작 마차 좀 구해줬다고 사람 목숨 구해주고 끼니 사주는 게 말이 되냐?"
고작이었나. 그럴 수 있지. 나는 금방 수긍한다. 짐이 몇백만길 짜리였든 그는 잘 몰랐으니까. 그에게는 모든 마차가 똑같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저, 사람 몇 명 태운, 뭔지 모를 짐이 실려 있는 수레. 아마 그 정도겠지. 아니, 실질적으로 구한 것도 아니잖아. 그냥 주의 좀 잡아준 게 다였어….
"남을 돕는 건 귀찮은 일이에요."
"허. 갑자기?"
"그걸 당신이 내게 해줬으니까. 아무 이유도 없이. 그래서예요."
그것 뿐이야. 나는 웃지 않았다.
나는 고한다. 꿈을 꾸었다고. 토해놓는다. 당신이 내 위에 올라타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고. 내 말이 거품처럼 끓고 당신의 눈물이 떨어졌는데 꼭 피처럼 비릿했다고.
아직도 기억한다. 당신이 그렇게 놀란 얼굴을 한 건 처음이었다.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놀람보다는 경악이었다. 아니, 아니, 더 구체화할 수 있다. 나는 당신에게서. 공포를 읽었다.
[프레히카]
"그건 내 이름이 아니잖아."
네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나는 눈만 깜빡였다. 너는 나와 키도 같으니 내가 굳이 눈높이를 맞출 필요도 없었다. 네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굳이 걸음을 옮겨 네 시야에 내 몸뚱이를 들여놓았다. 네가 흠칫 떨었다.
"그럼?"
어떡해? 나는 입속말만 했다. 네가 입술을 깨물더니 고개를 숙였다. 나는 올라온 네 손을 굳이 내리고 싶지 않았다. 네 입에서 무거운 숨이 흘렀다. 네 손 위에서 검은 눈이 날 보고 있었다. 네 입은 여전히 굳게 다물려 있었다.
"뭘 원해요?"
"존댓말 좀 그만하면 안 돼?"
"갑자기?"
"혼잣말할 때 존댓말을 하진 않잖아."
하지만 너는 내가 아니잖아. 그런 말까지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너는 들었으리라. 너는 내 무의식이었지. 분명히, 내 중얼거림은 네게 닿는다. 알고 있었다. 생각의 흐름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모른 체를 했다. 네가 욱신거릴 것을 알았다.
"…알았어. 그냥 욕심이지. 알아."
"무례하군요. 인지는 하고 있나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인물이 굳어 있었다. 사실 모험가가 화를 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이가 태반이었다. 모험가는 그대로 몸을 돌려 성큼 건물을 나섰다. 무겁기 짝이 없다는 커르다스의 철문을 사람 밀듯 거칠게 열어젖히곤, 평소와 다르게 소리가 꽝 울리도록 내버려두었다. 그제서야 그들은 술렁거렸다. 오르슈팡은 이미 따라나선 참이었다.
오르슈팡은 안다. 모험가에게 썩 좋지 않은 버릇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 모험가는 제 초코보에 올라타 고삐를 당기려 하고 있었다. 잠깐만, 벗이여! 오르슈팡이 다급히 외치자마자 모험가는 멎는다. 그러나 여느 때처럼 돌아보지는 않았다.
"어디에 가려고? 밤이 늦었어."
"얼은 눈밭은 익숙해요."
"이 시간에는 늑대도 많아."
"내가 죽기라도 할까요?"
모험가는 여전히 오르슈팡을 보고 있지 않았다. 모험가의 곁에 선 오르슈팡은 문득 모험가가 울고 있다고 느꼈다.
"미안하네."
그러자 모험가가 오르슈팡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르슈팡은 생각했다. 네가, 이렇게까지 감정이 드러나는 얼굴을 한 적이 있었나? 모험가는 입술을 짓씹었다. 소리를 삼키는 사람처럼. 그의 입가는 언제나 검은 딱지가 앉아 있었다.
"당신이 왜 사과를 해요."
"내 부하니까. 제대로 교육하지 않은 내 탓이야."
"그걸 왜 당신이!"
오르슈팡은 안다. 모험가의 목소리가 소리를 지르는 수준으로 크게 나는 일은 손에 꼽힌다. 그리고 이번이 그러했다. 모험가가 기침을 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초코보에서 내려왔다. 오르슈팡은 주춤거리며 그를 부축하려 했다. 했다, 그가 거부했을 따름이다.
"나는 네가 당신의 잘못이 아닌 일로 사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랑했다면 거짓말이겠지. 나는 그것들을 싫어했다. 모든 사람들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발 밑에서 눈알이 서걱이는 비명을 내질렀다. 눈물이 나올 것도 같았다. 내 눈물은 진작에 말라버렸다는 게 문제였지만. 울고 싶은 기분, 울고 싶지 않았던 나날들, 울 수도 없게 된 날들. 꼭 슬픔을 입에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 어둡고 캄캄하고 물겅한 감정들이 입안에서 구르고 있었다. 나는 그걸 삼킬 줄은 알았지, 토해내는 방법은 몰랐다. 삼키더라도 소화되지는 않았다. 입 밖으로 긁어낼 줄 모른다면 삼켜야 한다. 그게 쌓여서 내 목을 조르더라도. 이번에도. 그리 했다.
커르다스는 추운 곳이 아니었다. 커르다스는 눈밭이 아니었다. 커르다스는 하얀 곳이 아니었다, 커르다스는 차가운 곳이, 맞았다. 아니었다, 아니었던가? 나는 잘 떠올리지 못한다. 5년. 5년은 짧고도 긴 시간이다. 5년 이상. 어쩌면 10년까지도 내다봐야한다. 녹색이었던 커르다스는, 햇살이 아직 따가운 시절도 있던 커르다스는. 한참 바래어 사라진지 오래였다. 초원, 숲, 커르다스. 그러나 기억에, 내게 커르다스는 차가운 곳이었다. 다시 돌아가라면, 나는 망설일 것이다.
흰 숨이 흩어진다. 숨으로 꽃을 피울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이다. 식물이 땅에 뿌리내리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좋을 테다. 땅은 더러웠다. 나는 멍청한 생각을 자주 했다. 손이 따가웠다.
불행하게도 난 치유술을 배우지 않았다. 간단한 치유술 정도는 배워두지 그래? 넌 정령들에게 사랑받을 법도 한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사람과 더 엮이기 싫었다. 사람과 엮여서 좋은 일이 일어났던 적이 없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치유술을 배운다는 건, 내가 누군가와 만나야 한다는 뜻이다. 만남은 때로 스쳐지나가기도, 거대한 부름을 부르기도 한다. 내가 이때까지 겪은 모든 만남은 가볍게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대체로 내게 안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상처가 깊지 않은 것 같다. 소독은 해야할 것 같다.
가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항상 했다.
무지개목화 수십 송이. 소회향 몇 단. 쪽파 몇 단. 이 정도면 됐다. 충분하다. 혼자 고개를 끄덕인다. 새하얘진 커르다스를 걷는 일에는 익숙하다. 발간 선이 번지는 손가락을 보고만 있었다. 조금 빨리 걸을까. 싶다가도 마물에게 들키면 배로 귀찮아진다는 생각을 한다. 창도 제대로 쥐지 못할 손으로 마물을 만나면 귀찮아진다. 그것도 이런 인적이 드문 벌판에서라면.
그즈음이다. 때때로 나는 바람 소리에 섞인 괴성을 듣는다. 어느 짐승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걸음을 옮긴다. 눈이 내리는 시야에서 인영이 들어찬다. 제 키보다도 클 법한 검.
"여기서 뭐 해요?"
그러자 그는 펄쩍 뛰며 내게 검을 겨눈다. 발만 살짝 옮겨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을 정도로 피했다. 그의 하얀 눈이 찌푸려진다. 그가 목 끓는 소리를 냈다.
"미친, 조용히 오지 좀 말랬지."
"나는 소리를 냈어요."
"한 개도 안 들렸거든!"
안 추워요? 나는 물었다. 그의 옷 위에서 피가 얼어붙어 있었다.
네가녹아내리는꿈을꿨다그건이다지도참혹해서나는그만토악질을할뻔했는데뼈로스러지는네손이내입을막아서네살덩이가내입에들어와없어진네눈이흩어지는네입이나더러
*
추워.
사실, 이 도시는 춥다. 추울 수밖에 없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다. 그건 당연한 거지만, 보온이나 냉방도 지원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더위에, 추위에 갉아먹혔다. 어린 아이들은 열병으로 죽거나 얼어 죽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떻게든 살아남은 아이들은 커서 무엇이 되었는가. 그저, 건물 안이든 밖에서든 이럭저럭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될 뿐이었다. 바람의 유무가 꽤 큰 영향을 끼치기는 했다만, 글쎄. 그리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가령, 나처럼.
낡아 먼지가 날리는 건물은 아무도 오지 않는다. 그래, 여기는 아는 사람이 없는 건물이다. 정확히는, 오는 사람이 거의 없는 곳이다. 이 동네의 사람들은 죽었다. 대량학살이었다. 여기저기서 시체 썩는 내가 진동을 했지만 콘크리트로 뒤덮인 땅에 그들이 쉴 곳은 없었다. 머리가 시큰거렸다. 엔진의 탄내와 기름냄새가 코를 쑤셨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한다. 아무리 적응할 수 없을 것 같은 환경이어도 적응하기 마련이다. 내가 그렇게 됐다. 나는 피비린내가 욱신거리고 온 동네에서 비명과 총성이 울려도 적응할 수는 있었다. 익숙해지지 않았을 뿐.
기름낀 장갑을 벗었다. 슬슬 새 걸 장만해야하는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렸다. 정의감이 갉아먹힌지도 꽤 오래되었다. 나는 나가지 않는다. 수배자. 나는 경찰은 물론이고 민간에게도 눈에 띄어선 안 되는 사람이었다.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한지 얼마나 되었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 기억은 안개처럼 남아 내 목을 졸랐다. 쿠이나가 아직 말간 눈으로 웃던 날을 기억한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지금은 그 얼굴조차 떠오르지 않았지만, 이제는 목소리가 어땠는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상관없는지도 모른다. 내가 알던 쿠이나는 죽었다.
과거의 순간을 붙잡고 연명하는 일은 어리석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다른 길이 없었다. 나사가 끼릭끼릭 돌았다. 나도, 당신도 고아였다. 다른 점이라면 당신은 붙잡혔을 뿐이었지. 정부로 끌려간 인간이 제정신을 유지하는 일은 없었다. 내가 알기론 그랬다. 모두가 알기론 그랬다. 그리고 그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본 그는 내게 총을 겨누었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지금. 그는 내 행방에 5년의 식량과 안락한 주거지를 걸었다. 물론 거짓말일테다. 그러나 나라의 사람들은 굶주려 있었다.
나라엔 나같은 사람이 꽤 있었다. 정부에서 반란군이라고 지칭하는 무리. 자칭하기로 혁명군. 그들은 얼굴이 알려져있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나는 전자였고.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 모든 순간들이 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이 지독한 악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감각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머리가 멍했다. 너무 슬프면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뇌수가 끓는 기분이 들었다. 꿈이기를 빌었다,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움직이지 않는 몸을 겨우 뒤틀어 발을 디뎠으나 그대로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누가 날 깨워줘. 목에서 소리가 맴돌았다. 기듯이 걸었다. 떨어져내린 너덜한 고글을 주웠다. 꿈이 아니었다. 긁혀 흠집이 나고 끈이 그을린 고글은 내가 허리춤에 매고 있는 것과 꼭 같았다.
오... 상해? ...자해인가 여튼 묘사가 있습니다
여느 순간에는 검정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지평선이 갈리지조차 않는 하늘. 천장. 땅, 바닥. 눈이 느릿하게 끔뻑였다. 그렇구나. 나는 감흥이 없었다. 프레이. 프레이. 나는 가만히 당신을 머금었다. 당신이 내 말을 듣지 못할 리가 없지. 프레이. 당신은 반응이 없었다. 프레이. 오른손에는 부러진 창날이 들려 있었다. 프레이. 손을 들었다.
허벅지에서 붉은 선이 차올랐다. 서서히 넘쳐흐르는 빨강이 아래로 흘렀다. 온 신경이, 근육이 하나씩 뜯기는 기분이 들었다. 뼈를 긁었다. 프레이. 나는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프레이. 목에 날을 대려고 했다. 위에서 검은 손이 내려와 손목을 낚아챘다. 흐느낌이 옅었다.
"그만해, 제발…."
그렇게 당신은 울고 있다. 그제야 나는 손을 놓는다. 같은 색, 익숙하고도 낯선 눈에서 이질적인 빛을 읽는다. 내가 저런 얼굴을 한 게 얼마 전이었지? 흐릿했다. 까마득한 생각들. 기억들. 당신은 녹아내리듯 내 앞에 섰다. 미안. 사과가 낮았다. 그야. 당신이 날 마중나왔다면 나는 이런 일을 하지도 않았을테다. 하지만 결국 나는 당신을 죽이는 거나 다름 없는 짓을 하고 있었다. 당신이 울음을 머금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당신은 내 무딘 부분을 전부 날카롭게 갖고 있으니까…
"안아도 돼요?"
당신의 눈 끝에 위태롭게 매달리던 물방울이 끝내 흐르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다. 하. 숨소리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나는 잘 몰랐다. 당신은 웃었지만 사실은 미소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내게 거부권이 있었나요."
싫으면 안 해도 돼. 당신은 내가 하지 않은 말도 들었을 테다. 그러나 당신은 기꺼이 당신이 싫어하는 일을 했다. 해주었다. 그런 건 정말로 당신이 나를 닮았다고, 생각을. 했다. 차갑게 닿은 갑주판이 따뜻했다. 죽을 수 없다면 네 품에서 숨이 멎었으면. 딱, 지금, 이 순간에 내 숨이 끊겼으면. 하지만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신이 나를 천천히, 그러나 완강하게 밀어내었다.
나는 당신이 할 말을 알고 있다. 그리고 당신도 내가 할 말을 알고 있었다. 나는 살고 싶지 않았다. 된다면 절실하게, 당신의 손에 죽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죽기 싫은 나는 당신에게만은 내 목을 내놓고 싶었다. 하지만 너는 누구보다도 내가 살기를 바랐다. 영웅, 전사, 학살자, 그 모든 칭호를 내려놓은, 그저 온전한 내가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수식어들을 벗어던진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진정으로, 있을까?
메이아. 당신의 속삭임이 낮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메마른 당신이 울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네 선택을 존중해."
하지만, 제발 내게 널 죽이라고 하지는 말아줘.
당신은 파랑을 머금은 채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생각만큼 가혹한 사람은 아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 때의 심정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강요하지 않았다. 내가, 매 순간 바라는 일이었지만, 그리고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그러나, 나는 끝내 당신의 손에 칼을 쥐어주지 않았다. 나는 웃지 않았다.
"네 이름을 말해요."
당신이 문득 눈을 깜빡였다.
"프레이는 네 이름이 아니잖아."
"난 이름이 없어요."
"다른 사람의 이름을 훔치는 게 정당할까요?"
그러면 당신은 말하지 않는다. 나는 네가 네가 되길 바라요. 뱉지 않은 말을 속삭인다. 당신이 상처라도 받은 얼굴을 했다, 그러나 나는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내 목에서 나오지 않는, 같은 소리를 듣는 건 아주 낯선 일이다.
"나는 당신의 찌꺼기에 불과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등떠밀려 살고 있어요."
"내게 이름은 과분해."
"나도 내가 짓지 않은 이름으로 살아요. 당신의 이름 정도는 스스로 짓는 게 낫잖아요."
거짓말. 거짓말이었다. 매일 속이 뒤집혔다. 포만감이 들 때까지 무언가를 먹으면 구역감이 치밀었다. 먹는 양이 많이 줄었다. 수시로 메스꺼움을 느꼈다. 이따금 헛구역질을 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갈게요."
걸음을 뚝 멈추고 내뱉은 말이었다. 검은 그림자가 멎는다. 그가 날 돌아본다. 보이는 건 금색 눈 뿐이다. 내려앉은 눈동자에서 불안을 읽었다. 의아함. 어쩌면 공포까지도. 왜.
"어디를요."
"갈 데가 있어요."
"어디에 가십니까."
나는 종종 그가 성가셨다. 지금이 그랬다. 말들을 겨우 씹어넘긴다. 한숨은 쉬지 않았다. 내가 그걸 당신에게 말해야 하나요? 무얼 위해서. 왜 그렇게까지.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아. 꿈이구나. 하지만 뺨을 때렸다가 고막이 터지면 어떡하지? 머리를 벽에 박을까? 아픈 건 싫은데. 그럼 몸을 쑤실까? 좋네. 거기까지 생각하고 몸을 일으켰다. 창에 뻗은 손이 낚아채였다. 차가웠다. 꿈치고는 생생했다.
"일어났습니까."
완전한 존댓말이 아니었다. 당신은 어차피 내 무의식이니까 내 꿈에서 당신이 당신으로 존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당연하지 않으면. 사실 당신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은 내 바다에 가라앉아 있다면. 그럼 당신은 내 착각인가? 그럼 당신을, 나를 죽이는 셈인가. 그럼 나는 당신의 손을 뿌리치는 게 맞는 걸까?
"당신이 말을 안 하는 건 알지만. 제게까지 이러시면 섭섭하군요."
"이거, 꿈이에요?"
숨이 새는 소리가 났다. 김 빠진 웃음. 당신의 눈은 웃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안 믿을 거잖아. 왜 물어보십니까? 당신은 그렇게 말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손을 놓지는 않았다. 내가 뭘 하려 했는지 아는 듯.
"안심하세요. 당신은 잠에서 깼고, 나는 당신의 앞에 있어요."
"확신해요?"
"날 그렇게 부정하고 싶습니까."
"이리 와 봐요. 이것 좀 봐 줘요."
그 말에 와네하는 우뚝 섰다. 타람이 무언가를 보여줄 때는 대개 자신이 상대의 눈앞으로 가져와주는 탓이다. 굳이 오라는 건 그가 옮기지 못하는 무언가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타람은 이슈가르드 용기사단의 구설수에 아주 쉽게 오르는 용기사였다, 기사 열댓이나 용기사 셋은 달려들어야 죽일 수 있는 용을 혈혈단신으로 단번에 꿰뚫는다는. 그런 타람이 들 수 없는 것. 결국 와네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뭔데."
순간 와네하의 손이 멎었다. 타람은 여전히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없이 칼질을 하고 있었다. 부글, 기포가 끓는 소리가 났다. 타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썰어낸 고기조각을 찍어 입으로 가져가던 참이었다. 와네하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뭐라고?"
타람은 씹던 걸 금방 삼켰다. 와네하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보고 있었다. 타람이 그의 눈을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나랑 함께 가줘요."
"어딜?"
"그리다니아. 얼마 안 걸려요. 사흘 정도 내리 걸으면 도착해요."
"나가자고?"
타람은 대답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방금 그 말이 딱 그랬다. 허! 와네하는 헛웃음을 굳이 삼키진 않았다. 금방 술잔을 비운 그가 병을 새로 땄다.
"그러면 좋겠는데. 기사놈들이 날 여기서 내보준 적이 없거든."
"내가 있잖아요."
"니가 뭔 통행증이라도 되냐?"
어색하지만도 않은 침묵이 흘렀다. 타람은 문득 시선을 흘렸다. 대충 세서 5병. 하지만 그가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타람은 고기를 대충 씹다가 삼켰다. 십만길 정도는 나왔겠네. 하고 생각한 그는 식기를 내려두었다.
"가 줄 거예요?"
"내가 뭐하러."
"당신에게 나쁜 일은 없을 거예요."
와네하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취하긴 했나보다. 타람은 문득 생각했다. 투박하고 굳은 손가락이 움직여 빈 병에 닿았다. 그는 병의 주둥이를 손가락 끝으로 지탱한 채 병을 돌렸다. 타람은 알고 있었다. 그가 유쾌한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불쾌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보수는 주냐?"
"원하는 만큼 줄게요."
"허. 죽을 일인가보지?"
"난 그 정도로 험한 일은 부탁 안 해요."
왜? 나도 그런 건 받기 싫으니까. 그가 얼굴을 구겼다. 하지만 타람은 웃지 않았다. 그저 곧게 그를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희미한 등 아래서 검은 눈이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와네하는 입술을 짓씹은 채 한숨을 쉬었다.
"알았다고. 가면 될 거 아냐."
"고마워요."
그때도 타람은 웃지 않았다. 와네하는 일어섰다. 더 안 마셔요? 타람이 중얼거리듯 물었다. 안 먹어. 그는 의자 뒤에 기대두었던 제 검을 잡아 들었다.
"내일. 에테라이트 광장에 계세요. 그림자가 가장 짧을 때."
*
와네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해가 뜬지 얼마 안 된 참이었다. 일기예보사에게 눈이 오냐고 물어보러 가는 길에 그가 멀거니 서 있는 걸 봤다. 정확히는, 멀거니라기보다는 에테라이트의 푸른 빛을 받으며 무언가를 펴놓고 보고 있었다. 적어도 그가 보기에는 그랬다. 저건 저기서 뭘 한대. 와네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날씨를 확인하고, 금방 거리로 돌아왔다. 날은 맑을 예정이었다. 그는 아이들과 노인 몇에게 음식을 조금 나누어주고 잊힌 기사주점에 들렀다. 마땅찮은 마물 수배서는 없었다. 와네하는 그러려니 서부고지로 향했다. 영양을 몇 마리 잡은 그는 그림자를 확인하곤 이슈가르드로 돌아왔다.
타람은 그때까지도 거기에 있었다. 정확히는 활 비슷한 무언가를 만지고 있었다. 다 얼어 붉은 손가락으로 시위를 고치고 있었다. 와네하는 멀찍이서 털썩 앉아 그걸 보고만 있었다. 별달리 할 게 없었던 탓이다. 한참을 찌푸린 눈으로 손질만 하던 타람이 어느 순간 벌떡 일어섰다. 생각없이 검을 다듬던 와네하는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와네하는 별 고민도 없이 고개만 꺼떡거려 인사를 대신했다.
"어, 언제부터 있었어요?"
"글쎄다. 꽤 됐지."
"말, 했으면 좋았을텐데."
"못 듣겠더만."
그래서. 끝났냐? 네하는 검을 등에 지며 말했다. 타람은 고개만 끄덕였다.
안녕.
그는 건조하게 말했다. 좋은 아침. 일 리 없지. 그는 잠을 자지 않는다. 잘 필요가 없다고 했다. 먹지 않아도, 자지 않아도 그는 살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는 그렇게 있다간 댐이 터지듯 갑작스레 쓰러졌다.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의식을 잃은 그는 일주일은 내리 허공을 떠돌았다.
가스터는 식사하지 않는 괴물이다. 그 누구도 가스터의 취식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건 하루 중 18시간을 가스터와 함께 보내는 샌즈도 마찬가지였다. 위대한 과학자, 마법사, 역사상 최고라고 단언해도 될 정도로 뛰어난. 현재 괴물의 마법학이론 반 이상을 그가 증명하고 채워넣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러나 가스터는 식사하지 않았다. 잠은 자긴 하나요? 샌즈가 지나가며 묻는다. 아니. 그러면 계산을 잊잖아. 가스터는 느리고 작은 동작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가스터는 식사도, 수면도 취하지 않는다. 그러면 당신은 어디서 에너지를 얻는 거지? 샌즈는 갸우뚱거렸으나 이내 잊었다. 실험 결과를 올리는 보고서의 마감이 두시간 남았으므로.
가스터는 생각만큼이나 과학에 몰두하는 괴물이 아니다. 동시에 생각보다 훨씬 더 과학에 골몰하는 괴물이다. 그의 행동이 느린 것은 그가 언제나 머릿속에서 온갖 가설과 그를 증명하기 위한 계산과 타당한 논리를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스터는 괴물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 언제나 모든 말을 귓등으로도ㅡ그런 게 있다면의 얘기지만ㅡ 듣지 않는 듯한 그는 사실은 자신에게 오는 말 정도는 줍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과학에 묻힌 제 자아를 아주 조금 가볍게 만들어 의식의 수면으로 건져올린다. 그러나 완전히 빠져나오지는 않는다. 한 편으로는 증명의 수식을 가다듬으며 대답을 토해낸다. 수화가 영 아귀가 맞지 않는 건 그때문이다. 듣고 있어요? 그러면 가스터는 느리게 끄덕인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수도 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들을 가치조차 없다고 판단하면 진실로 수용하지 않는다.
왜 그렇게 과학을 좋아합니까. 샌즈가 물었다. 가스터는 낮게 대답했다. 내 삶이 편했으면 좋겠군. 샌즈는 수긍했다. 눈을 데구르르 굴리던 샌즈는 가스터가 웃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의식 과잉이었을는지도 모른다. 샌즈는 가스터가 자신에게 유하다고 느꼈다. 비록 빌어먹게도 감사할 잔업을 주고 있더라도 그랬다.가스터는 샌즈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언제나 조그맣게 고개라도 끄덕였다. 심지어 이따금 웃기도 했다! 그걱 무엇을 의미하는지 샌즈는 잘 몰랐지만.
하지만 샌즈는 안다. 그건 가스터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샌즈에게 비추는 상냥함ㅡ그건 그렇게 칭해도 될런지 모르겠지만 하여튼ㅡ은 자기애의 연장이었다. 샌즈는 가스터의 창조물이었다. 가스터의 감정기복은 생각보다 심한 편이다. 그 감정이 긍정을 띠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나. 샌즈는 기억한다. 아주, 아주아주 드물게 가스터가 달떠있던 날을 기억한다.너는 내 생애 최고의 걸작이야.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가스터의 기계적이던 목소리가 풀어졌던 건. 가스터가, 가히, 애정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간지러운 무언가를 품은 목소리를 냈던 건. 샌즈는 깨달았다.
우리, 조금 재밌는 걸 해볼까.
가스터가 스쳐지나가듯 뇌까린 손짓이었다. 샌즈는 선 채로 굳었다. 그제까지 가스터가 재미라는 단어를 쓴 적이 없던 탓이다. 어떤. 당신의 재미라는 건. 어떤 거지?
느리게 걷던 가스터의 발이 멈췄다.
"샌즈."
목소리가 떨어져 부서졌다. 샌즈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건조한 얼굴이었다. 대답해. 무표정한 미소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무엇을요? 샌즈는 당장 묻고 싶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그건 반문을 허락하는 문장이 아니었다. 청유의 뜻을 품은 게 아니었다. 강제성. 헤. 샌즈는 웃었다.
"내게 거부권이 있던 적이 있나요."
좋아. 샌즈는 길고 가는 손가락이 헤엄치는 걸 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오랜만이지 않나? 구멍난 손이 느리지 않았다. 가스터가 의식을 대화에 맞추고 있는 건, 얼마만의 일이지? 그러나 느린 말에 익숙해졌던 탓인지 샌즈는 문장을 놓쳤다. 손이 멈췄다.
"집중해."
가스터가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썩 미안해보이지 않는 목소리. 그러나 가스터는 개의치 않았다.
나는 매우. 매우 걱정스럽다. 네가 갑작스러운 위험에 맞닥뜨릴 때. 내가 없다면. 여기에는 굳어버린 빵만도 못한 뇌를 가진 괴물이 수천이지만. 너는 다르지. 나는 네가 그나마, 가장 뛰어난 괴물이라고 여긴다.
거기까지. 가스터의 손이 뚝 멎었다. 샌즈는 무심코 가스터를 쳐다봤다. 가스터는 언제나 건조한 미소를 유지하지만 아주 미세한 차이는 있었다. 그건 일주일간 엿새를 함께한 샌즈 정도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의아해하고 있었다. 눈이 느리게 끔뻑였다. 샌즈가 눈을 깜빡이면 찡그린 눈을 한 가스터가 있었다.
... ...멍청한 소릴. 내가 만들었으니 당연한데.
어련하시겠어. 샌즈는 샐쭉 웃었다.
요점은 이게 아니야... 그래. 나는. 나 없이도 네가 널 지킬 수 있기를 바란다. 누구보다도 간절히.
"하지만 가스터. 당신이 준 파란 마법 정도면 충분하다고요."
"아니."
부족해. 절대로. 그즈음의 샌즈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가스터가 이렇게 단시간동안 세 마디 이상을 한 적이 있었나...?
파란 마법은 내 마법이야. 좋은 무기지. HP를 소모할 수 있다는 점만 빼면.
샌즈는 눈치챘다.
나는 네게. 새 무기를 만들어주려고 해.
*
천하의 가스터도 지치는 순간이 있었다. 샌즈는 그 순간을 가장 싫어했다. 가스터가 소리를 낼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건 뒷일이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지나치게 말하면 목에서 검은 물이 터져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지쳤을 때 그는 마비된다. 파란 마법에 일방적으로 가스터 앞에 앉힌 샌즈는 고개가 꺾인 가스터를 본다. 그때 가스터는 멍한 눈을 움직이지도 않고 손가락만 꺼떡거려 샌즈의 앞에 종이 뭉치와 펜을 놓는다. (이탤릭체)적어. 그리고 그때부터 가스터는 쉴새없이 뇌까린다. 자신이 세우던 이론들, 논리들, 계산을 전부 차근차근ㅡ딱히 차근차근이 아니지만ㅡ 쏟아낸다. 샌즈는 그 모든 말을 기록한다.
"더. 있나? 더. 있던가. 없는. 것 같군."
거기까지 말한 가스터는 입 옆으로 새카만 액을 흘리고 있었다. 샌즈는 닦아주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부러질 것 같은 뼈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즈음의 가스터는 늘 그랬듯 웃고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샌즈가 거기서 아주 약간의, 긍정적인 감정을 읽었다는 것 정도.
그런 식으로 모든 생각을 토해낸 가스터는 평소보다 조금 가벼웠다. 그 순간만큼은 가스터가 아이같다고 생각했다. 완전 꼬마는 아니고,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 선 어느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을. 다음날에는 찢어진 목을 부여잡고 온종일 구겨진 얼굴을 하고 있더라도.
"고생했네."
"말은 잘 하시죠."
가스터는 샌즈를 보고 있었다. 가스터가 시선을 주는 괴물은 별로 없다. 샌즈는 알고 있었다.
"상이라도 줄까."
"무슨 상이요."
"따라와."
가스터는 목이 아프다고 종알대곤 했으나, 그런 날은 체념이라도 한 것처럼 말을 이었다. 오래 말을 하지 않은 그의 목소리는 날이 서 있고 건조하다. 불규칙한 억양, 그러나 똑똑한 발음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안 따라가면요."
"말리진 않아. 파랗게 되고 싶다면."
밭은 숨과 함께 검정이 튀는 걸 보고 있었다. 샌즈는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일어났다. 아니, 떨어졌다. 아니, 덜컥 걸렸다. 샌즈가 기침을 했다. 가스터는 드물게 소리내어 웃었다.
"미안하게 됐군."
"기왕 잡아주셨으니 끌고 가주시죠."
"네가 아기는 아니잖아?"
하지만 그가 샌즈를 내려놓는 손길ㅡ그것이 손길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으나 마땅한 단어는 없었다ㅡ만은 조심스러웠다. 그래, 방금 막 잠든 어리고 어린 괴물을 내려놓듯이. 해골은 허파가 없다. 그러나 샌즈는 한숨을 쉬었다.
"그냥 말씀해주시면 안 됩니까?"
가벼워진 가스터는 유독 눈을 자주 맞춰주었다. 무엇을? 샌즈는, 어이없게도, 가스터가 정말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주신다는 상 말이에요. 당신도 나도 피곤한데 굳이 움직여야겠습니까."
"오, 샌즈."
가스터의 손은 차갑고 건조하고 딱딱하다. 샌즈는 온몸이 차갑고 건조하고 딱딱했으므로 별달리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손목이 잘려 둥둥 뜬 손이 자신의 두개골을 쓰다듬는 건. 썩 유쾌한 일은 아니리라. 네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좋을 거야. 가스터가 키득이는 것 같았다. 그는 이럴 때에만 잠깐, 아주 잠깐 유쾌해지곤 했다.
"좌표라도 주시죠, 순간이동이 나을 것 같은데."
"곧 볼 수 있어. 네 힘을 아끼거라."
샌즈는 생각한다. 가스터가 들뜨는 순간을 떠올린다. 기억에, 그는 자신감과 자존감으로는 진작에 지상으로 나갔을 괴물이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가스터는 그런 괴물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연구 결과에도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괴물들이 놀라는 건 당연했다. 실제로 그는 지하에서 독보적인 존재였으니까. 그런 가스터가 상을 준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선물일까? 글쎄다! 아마 그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보여주고, 그걸 샌즈에게 주려는 심산일게다. 그런데, 가스터는 들떠 있었다. 자신의 결과물을 보여줬을 경우 샌즈가 어떻게 반응할지를. 기대를. 샌즈는 한숨을 먹었다. 뚜걱이는 발소리가 검은 로비에 울렸다. 여전히 검은 물자욱이 방울방울 이어졌다.
"말했듯이."
여느 방 앞에 멈춰 선 가스터가 느지막이 중얼거렸다.
"나는 네가 네 몸 정도는 지켰으면 해."
문이 열리는 걸 지켜보던 샌즈는 숨을 삼켰다.
그건, 그러니까, 샌즈는 반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건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었다. 자신과 유사한 방법으로 만들어진 무언가였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속삭이는 소리가 꼭, 심연같았다.
*
가스터의 목적은 실로 단순했다. 자신의 안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텐데 그의 성과로 많은 괴물이 윤택한 지하생활을 누렸다. 지하는 지상처럼 변하고 있었다. 단순했다. 나는 지상의 여러 환경이 좋았거든. 그걸 구현하려다보니 그렇게 된 거지. 의지 수용성은요? 샌즈가 물었을 때, 가스터의 표정은 퍽이나 안 좋았다.
"아, 썩을."
샌즈는 알았다. 순간적으로 욱한 그가 연산을 까먹은 것이다. 샌즈는 고개를 돌렸다. 곁눈으로 가스터의 손을 보면서. 그건 망할 털복숭이 놈이 시키는 거지. 여전히 찌푸린 얼굴을 한 가스터가 멎었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흥미로워서 계속 하고는 있다만. 그 뻔뻔한 작자는 내가 제 아래에 있는 줄 알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당신이 당신을 좀먹는 걸 보면서도 나는 한없이 무력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나로서 존재할 수도 없어 소리내어 울지도 못했다. 흐느낌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당신은 그렇게나 나약한데도 이다지나 친절하여 못내 쓰게 웃었다. 나는 당신을 보면서 울고 싶었다, 죽은 눈물과 말라 갈라진 숨이 흩어졌다. 당신에게 말하고 싶은 게 아주, 아주 많았다.
나와 함께 가자.
나는 아주, 아주, 아주 오래 전부터 당신에게.
*
"나. 이제 안 올 게요."
나는 순간 뭘 잘못 들었나 했다. 고개가 돈다.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듯이 빵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네? 썩어들어가는 목을 겨우 움직였다. 너는 남은 빵조각을 멀거니 보다간 종이에 도로 싸서 집어넣었다.
"지쳐서요."
네 말은 그게 끝이었다. 지나치게 간결했다. 그래서 무언가, 더, 와닿는 것만 같았지. 바람이 불어도 너는 눈을 깜빡이지 않는다. 이제 손을 어딘가에 넣거나 하지도 않았다.
"내가 당신을 힘들게 했습니까?"
묻는다. 나는 안다. 네가 누군가의 눈을 똑바로 보는 일은 드물다. 너는 고요히 나를 보고만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아니지만, 하지만.
"어쩌면."
말이 낮았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암흑에 먹히지 않게 해야해요."
"나는 미쳐도 돼요."
숨. 그는 가끔 헐떡거렸다. 손톱이 일어나 갈라지도록 땅을 긁고 죽을 것처럼.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가 도움을 바라지 않은 탓이다. 나는 그저 그 곁에 앉아 있었다. 하던 일도 뚝 멈추고 그를 보고 있었다. 유독 달뜬 숨소리가 낯설었다. 너. 손 쓴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문득 네 손이 흉 투성이인 게 장인이라서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기어이 숨에 물기가 어려도 나는 가만히 있었다. 몇 분간 그랬다. 움직임이 천천히 멎었다. 꼭 멈춘 것처럼. 죽은 것처럼.
"잡아줘?"
그제야 섬칫하고 움직인다. 죽은 건 아녔구만. 그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손을 내밀었다. 그러냐. 나는 그냥 장갑을 벗고 손을 잡는다. 차가웠다. 창백했다. 하지만 손이 아프진 않았다. 좀 치사하게 살지 그래. 말이 목 끝에서 돌았다. 그렇게 죽을 것처럼 아파하던 그는 내 손에는 힘을 주지 않았다. 내 손이 부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라도 하는 거겠지. 멍청하긴.
"괜찮아지면 말해."
검은 머리가 끄떡거리지는 않았다. 나는 별달리 할 일도 없어서 앉아만 있었다. 하늘이 거맸다. 서늘하고 눅눅한 공기가 코끝을 적셨다.
워터폴은 검다. 검고 서늘하고 축축하고 눈이 부시다. 메아리꽃. 이래도 되는 걸까? 그걸 꽃에다 속삭이고 가면 어떡해. 대답을 하더라도 너는 듣지 못할텐데. 그런 생각들을 한다. 꽃들은 스쳐지날 때마다 소곤거린다. 작은 웅성임이 자근거린다. 신발이 젖는 것 같아.
여기에 이런 길이 있던가? 문득 낯선 길이 보였다. 이상한데. 지하에 있은지도 벌써 1년이었다. 지하는 생각보다 좁아서 길을 꿰는 건 생각만큼이나 쉬웠다. 걸었다. 점점 메아리꽃이 사라졌다. 물들이 없어졌다. 야광버섯이 사라졌다. 남은 건 암흑이었다. 길을. 잘못 들었나? 나는 잘 몰랐다. 돌아가는 방향조차 모호했다.
괴물.
비명을 겨우 씹어삼켰다. 흰 천이 떠있다고 생각했는데 긴 괴물이 서 있었다. 천을 뒤집어쓴 괴물이 서 있었다. 착각이었나, 괴물은 날 보고 있었다. 팔 없는 손이 둥실 떠올랐다. 길고 가늘고 말랐으며 기괴한 손이었다. 손이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단순한 손동작은 아니었다. 수화인가? 하지만 저런 수화는 본 적이 없는데. 괴물의 손이 멎는다. 허리. 였을까? 나는 잘 모른다. 그건 마치 허리를 숙이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이상하게도, 목소리에는 노이즈가 낀 듯 불규칙한 억양이었다.
왜. 무슨. 일이니. 여기에.
그런 말이었다. 아마도. 당신은 누구야? 이름을 말하려 했다. 그러나 손가락이 입에 닿았다. 알아. 괜찮아. 괴물이 웃은 것 같았다.
정의내릴 수 없어. 나는. 잊혔지.
못 해. 알려주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의 말은 그렇게 토막난다. 갸우뚱거렸다. 얼핏 천 사이로 그의 입이 보였다. 웃고 있었다. 이상하지, 하지만 즐거워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건 슬퍼보이기도, 쓸쓸해보이기도. 문득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내민 것 같았다. 두 손이 나란히 있었다. 뻗은 것처럼.
잠시 빌려주렴. 네 머리.
괴물을 쳐다봤다. 나를 해칠까? 알 수 없었다. 괜찮아. 로드하면 되겠지. 선뜻 앉아 고개를 숙였다. 친절하구나. 그가 속삭였다. 그의 손은 생각보다 훨씬 더 서늘했다. 엷은 손가락이 악몽처럼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이런 마법을 쓰는 괴물이 있었나? 나는 잘 모른다. 그건 아마 스노우딘이었다. 아마도 샌즈와 파피루스의 집이었고. 그리고 아마도. 샌즈의 방이었다.
여기. 들어갈 수 있을 거야. 너는. 검은색.
그 뒤는 듣지 못했다. 목소리가 잡음이 된 탓이다. 내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자 그의 손이 떨어졌다. 허공에 머물던 손이 천에 닿았다. 문득 나는 그가 사람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에 떨어진 뒤 저처럼 인간에 가까운 형체를 본 적이 있던가... 비록 입은 섬뜩하게 웃고 있더라도. 가렴. 혹은. 다녀오거나. 그가 속살거렸다.
눈을 깜빡였는데 스노우딘에 있었다. 심지어 뼈형제의 집 앞이었다. 뭐야. 놀라서 굳어 있었더니 문득 문이 열렸다.
"인간! 왔으면 말이라도... 세에상에, 너 얼었잖아!"
어? 내가? 파피루스는 덜거덕거리며 날 안았다. 이상하게 감각이 없었다. 차가워, 인간! 어서 들어와! 얹히듯 안겨 들어와보니 TV가 켜져 있었다. 메타톤의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파피루스. 검고 흰 괴물을 알아? 수습할 수 없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다. 샌즈에게 물어보면 뭐라도 나올테다.
어둠은 죽음처럼 깊고 그리운 누군가의 손길처럼 따뜻했다
*
나는 가끔 꿈을 꿨다. 내가 죽는 꿈을 꿨다. 그건 사람에게이기도, 야만신, 마물에게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죽는 건 같았다. 기억한다. 온몸의 근섬유가 끊기며 잡아뜯기는 느낌을, 전신이 타오르며 지옥의 불길에 싸이던 순간을,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중력에 장기마저 내려앉히던 기분을, 해일에 숨이 막혀 눈이 아득했던 날을, 몸이 얼어붙다못해 뼈마저 갈라질 것 같던 시간을. 하지만 그것들은 꿈이었다. 종증 그런 꿈이 나를 비참하게 했다. 살 수 없었다. 하지만 살아야했다. 죽을 수도 없었다. 문득 울고 싶었다. 우는 법을 잊었다. 눈물이 나오지도 않았다.
흰 숨이 흩어졌다. 손끝이 차가웠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슈가르드. 차가운 커르다스에 위치한 종교도시. 그런 곳에 있었다.
"…당신. 무슨 일 있습니까?"
응? 나는 손에 붕대를 감다 말고 반문만 했다. 건조하고 어딘가 갈라진 목소리는 언제나 묘한 불안을 품고 있었다. 언뜻 그건 공포와도 비슷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불안에 가까웠다. 손목이 저렸다.
"안색이 안 좋습니다."
"지금의 커르다스는 추워요."
"기분이 안 좋아보인다는 뜻입니다만."
"그냥 말해요."
구체적으로. 속삭인다. 그는 감이 좋은 사람이었다. 돌려 말하는 것에는 익숙했다. 그래서 남이 돌려 말하는 것도 금세 알아차렸다. 된 것 같은데. 손을 한번 죄었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 없었던 탓이다. 눈이 마주쳤다. 아주 조금 탁한 금색 위에 인영이 떠 있었다. 질끈 감긴다. 그는 질렸단 듯이 한숨을 폭 쉬었다.
"기운이 없다고요. 우울한 사람처럼."
"아. 정확하네요. 나는 항상 우울해요."
"진담이겠군요."
"어떨 것 같아요?"
사박이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감던 눈이 뜨였다. 숲은 검었다. 모든 게 그을려 죽은 숲에서 홀로 채색된 그는 쉽게 눈에 띄였다. 그는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무언가 찾는 것처럼. 공간을 찢었다.
나를 마주하는 그는. 언제나 숨을 삼켰다. 첫 숨을. 나는 그에게서 어렴풋한 공포를 읽었다. 하지만 그는 떨지도, 뒷걸음치지도 않았다. 그저 다시 금방 웃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요히 떠 있을 뿐이었다.
"오랜만이에요."
"느긋한 인사나 하자고 온 게 아닐텐데."
"왜요? 난 그러면 안 돼요?"
너는 날 싫어하지. 나는 알았다. 두려워하던 혼돈이었다. 검게 물든 난 그에게 악몽같은 존재였을 테다. 그러니 만날 적마다 그렇게 긴장을 하고… 마치 거리낀다는 듯. 나는 잘 알았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훑고 지났다.
"나는 그냥 네가 보고 싶었어요."
*
거짓말. 거짓말이었다. 숨이 막혔다. 웃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입가에 경련이 이는 것 같았다. 괜찮아. 소매를 꽉 쥐었다. 이상한 일이지. 감정은 쓸모없다고 여긴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 감정에 휘둘리고 있었다. 당신은 날 한심하게 보겠지, 그리고 없애지는 못 하겠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사이타마가 선 주변은 잔해뿐이었다. 여기가 원래 황무지였나, 싶을 정도였다. 도시에는 콘크리트 잔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먼지들. 이상하네, 분명 이쯤이 U시일텐데. T시를 지나왔으니 그가 선 곳은 U시가 맞았다. 도시 하나를 붕괴시켜버리는 괴인이야 흔했지만, 그렇게 도시가 있던 흔적을 말끔히 지워버리는 괴인은 드물었다. 사이타마는 그저 걸었다. 진짜 아무것도 없네. 뭘 하면 이렇게 된담. 사이타마는 태평하게 생각했다. 도시의 주민들은 진즉 대피했다고 보고됐다. 그러니까, 사상자는 없을 테다. 있다면야 아마도 히어로다.
전기가 빠직이는 소리가 났다. 사이타마는 그래서 멈춰 섰다.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 찾는 사람처럼.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문득 그는 몇 걸음 걸었다. 허리를 숙여 땅을 툭툭 쓸었다. 무언가 드러났다. 먼지에 덮여 빛을 제대로 반사하지 못하는 철 덩어리가 있었다. 사이타마는 아예 앉아 그 주변을 쓸었다. 썩 조심스럽지도 않지만 그렇게 거칠지만도 않은 손길로. 제노스였다. 였을, 것이다. 그가 부서지는 일은 예사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심한 손상은 손에 꼽혔다. 하체는 어디 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고, 팔이 있었을 어깻죽지도 녹아 있었고… 사람으로 치면 폐가 있을 자리 언저리가 삭아 코어가 드러나 있었다. 그의 하관이 없었다. 녹은 철이 흙 알갱이와 섞여 눈을 덮고 있었다. 제노스? 사이타마가 중얼거렸다. 코어가 흐리게 빛났다. 정제되지 않은 소리가 잡음처럼 헤엄쳤다. 괴인은? 기계는 침묵했다.
사이타마는 기계를 들어 올렸다. 꼭 품에 들어가는 게 물건같았다. 딱, 애매하게 많은 짐을 끌어안은 모양새. 기계는 맥없이 사이타마에게 안겼다. 그는 그대로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허공을 응시하던 그가 천천히 걸었다. Z시 반대 방향이었다. 그리고 한참을 걸었다. 기계는 끊긴 전선에서 스파크가 이는 걸 느꼈다. 어디선가 기름 냄새가 번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어둠에 갇힌 시야에서 의식이 깜빡깜빡 명멸했다. 문득 불안했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어느 순간에 사이타마가 속삭였다. 제노스. 데려다줄게. 맞으면 끄덕여. 기계는 사이타마가 무얼 말하는지 몰랐지만 일단 끄덕였다. 끄덕이고 나서야 박사의 연락처를 묻는 걸까, 어렴풋이 생각했다.
사이타마는 0부터 9까지의 숫자를, 기계가 주억거릴 때까지 읇었다. 맞다고 하면 다음 자리 숫자로 넘어갔다. 그는 그런 식으로 귀찮은 일을 했다. 이게 끝이야? 그렇구나. 기계는 철판이 가볍게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다이얼 따위가 눌리는 소리를 들었다. 응, 네가 박사야? 제노스가 다쳤어. 어디 살아?
그래서, 망가진 기계는 연구실로 옮겨졌다. 크세노 박사는 제노스가 그렇게 망가진 건 처음이라고 했다. 수리에 며칠 시간이 걸린다는 말에 사이타마는, 그래? 그럼 나 먼저 갈게. 하고 돌아 나왔다.
*
콜록.
엥? 뭐야. 사이타마는 손등 위로 하늘하늘 내려앉은 꽃잎을 봤다. 꽃 같은 건 없었다. 꽃이 피면 꽃이네, 봄인가, 봄이 아닐 수도 있지 뭐, 하는 사이타마와, 꽃이군요, 하고 끝내는 제노스였다. 그런 둘이 사는 방에 꽃이 있을 턱이 없다. 창문을 열어놨나? 아니었다. 사이타마는 그제까지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디서 붙어온 거겠거니, 하고 말았다.
사이타마는 문득 일어나 앉았다. 건조한 시선이 테이블에 닿았다. 선생님. 제노스는 곧게 앉아 우직한 목소리로 사이타마를 부르곤 했다. 소리가 귀에 박혔나, 괜히 귀에 손가락을 넣던 그는 금방 일어섰다. 장을. 보러 가야지. 사이타마는 어슬렁거리며 현관에 섰다. 대충 신발을 구겨신곤 문을 열었다, 다시 닫았다. 고개를 돌리면 제노스가 서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없었다.
사이타마는 마트 내를 휘적이고 있었다. 세일하는 시간대는 아니었다. 그냥, 냉장고에 먹을 거리가 떨어졌었다. 제노스가 연구소에 맡겨진 지 꼬박 나흘되는 참이었다. 평소 이인분으로 챙겨뒀던 식재료도 혼자 나흘을 버티다 보면 떨어지는 법이다. 제노스는 자신의 신체 대부분이 개조된 사이보그라고 했다. 실제로 그랬다. 하지만 사이타마는 그가 부서지는 모습에 쉬이 적응하질 못했다. 그래도 사람이니까, 다친 건 다친 거지. 좋아하는 거라도 해줄까. 싶어서 진열된 것들을 휘 둘러보고 있었다. 둘러보고만 있었다. 사실은, 그는 제노스가 무얼 좋아하는지 몰랐다. 생각해보면 제노스는 제 얘기를 하지 않았다. 아마 제노스가 들이닥친 날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이타마는 길게도 늘어지던 그의 말에 역정을 냈던 걸 떠올렸다. 그러니까, 그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이타마는 옅은 한숨을 쉬며 달걀을 집었다. 그리고 정어리 통조림도 챙겼다.
밤이었다. 하늘이 옅었다. 막 기울어가는 해는 자색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싱싱했던 붉은 색이 점점이 갉아 먹혀 죽어가는 시간대였다. 사이타마는 스러져가는 땅거미를 가만히 보다간 몸을 틀었다. 콜록. 붉은 잎이 흩어졌다. 사이타마는, 감기인가, 하고 말았다. 나오지도 않은 코를 킁, 들이마신 그는 고요한 거리를 걸었다. 사람은 물론 없다. 하지만 동물까지 없었다. Z시의 무인거리는 그랬다, 숨 막혀 죽을 듯한 고요. 누군가 비명을 지르더라도 반응 없을 거리. 그래서 더 인적이 없으려나. 사이타마는 혼자 갸우뚱거렸다.
나는 가끔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웃었다. 안녕. 하지만 너는 웃지 않았다. 네가 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장도 없는 너는 눈물샘조차 없었다. 너는 흐린 얼굴로 서 있었다.
난 죽지 않는다. 불사는 축복이 아니다. 죽여달라고 애원했다. 부질없었다. 빛의 가호. 초월하는 힘. 다 무슨 소용이지? 감각이 고통에 익숙해지질 않았다. 기억한다. 뼈까지 녹을 것 같던 지옥불을, 오감이 마비될 것 같던 지진을, 살과 근육이 찢겨나가던 바람을, 가라앉을 것 같던 심해를. 하지만 난 살아 있었다. 그 모든 고통을 겪고도 살아 있었다. 죽어야 할 순간을 지나서도 살아 있었다. 나는 죽고 싶어.
네가 서 있었다. 날 그렇게 보지 마. 난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 웃는다. 너는 웃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서 있다.
오리하라 이자야. 그게 내 이름이다. 었어야 했다. 숨을 먹었다. 입을 있는 힘껏 틀어막고 새어나오려는 숨을 삼켰다. 시야가 이상하게 흐렸고 이상하게 얼굴이 뜨거웠다. 어깨가 떨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은 탓인지 후들거린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하지만 그래도 숨쉬지 않았다. 이자야. 이자야. 이자야. 오리하라. 너만은, 날 그렇게 부르면 안 돼.
"잠깐만."
모험가는 곧이 멈춰섰다. 그의 습관이었다. 그런 말은 대개 저에게 향했다. 사실, 대개든 뭐든 상관없긴 했다. 모르도나. 뒤틀린 크리스탈이 낭자한 땅. 호수가 바로 보이는 높은 절벽에는 두 명밖에 없었다. 목소리는 낮지도 않았다. 모험가를 불러세우는 말이었다. 그래서, 모험가는 순순히 발을 그쳤다. 짙은 옥색, 선명한 붉은 눈이 모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모험가는 몸을 마저 돌렸다. 그는 멋쩍은 듯 샐쭉 웃었다.
"상담 좀 해도 돼?"
모험가는 갸우뚱거렸다. 그러나 곧 주억거렸다. 모험가는 알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감정을 썩 제대로 감주친 못했다. 엷은 불안이 가시고 안심한 것처럼 웃는 그를 그저 보고만 있었다.
"크리스탈 타워예요?"
"반쯤은?"
근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알았지? 꼭이야? 모험가는 그가 유쾌한 척 말하는 것을 알았다. 모른 척만 했다. 모험가는 다시 끄덕였다.
모험가는 입이 무거웠다. 거의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다. 그는 말하고 싶은 건 물론이고 말해야 하는 것조차 씹어넘기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쉬이 눈치채지 못했다. 모험가는 앉아 있었다. 크리스탈 타워가 곧이 보이는 자리였다. 누가 밀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절벽에 다리를 내어 앉아 있었다. 모험가는 죽어도 괜찮은 사람처럼 굴고는 했다. 그는 때때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으나, 서 있던 적은 없었다.
그라하는 종종 크리스탈 타워를 보러 나오곤 했다. 노아의 일원으로서, 알라그 역사에 가장 관심이 깊은 건 그였다. 그런 그가 자리에 올 때마다 모험가는 앉아서 멀거니 타워를 보고 있었다. 몸을 아껴, 넌 강한 사람이니까. 내기해도 좋아, 넌 역사에 이름을 남길걸. 그런 말을 들은 모험가는 그래요, 하듯 고개만 끄떡이고 말았다. 전혀 몸을 사리지 않았다. 마치 그런 충고는 들은 적도 없다는 것처럼. 괜한 심술이 올라 밀치는 체를 한 적도 있었지만, 모험가는 뒤만 슬쩍 돌아보았다. 아마 그때 내가 안 붙잡았으면 그대로 떨어졌을걸. 그라하는 중얼거렸다. 너, 죽고 싶어? 그라하가 놀란 눈으로만 그렇게 말했다. 모험가는 어색하게 웃었다. 애매한 침묵은 긍정이다.
그라하가 서 있었다. 낮은 인기척이 났다. 얕은 발소리가 닿았다. 대충 눈치는 챘으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는 몸을 살짝 틀었다. 모험가가 서 있었다. 눈이 마주쳤을 때 모험가는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안녕.
"바빠요?"
그는 웃었다.
"눈 돌아가게 바쁘지! 무슨 일이야, 모험가?"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그라하는 움찔했다. 모험가가 그런 말을 한 게 처음이어서다. 아니, 아마 모험가를 아는 사람 전부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할 테다. 그만큼 의외였다. 모험가는 술을 들고 있었다. 제법 비쌀 듯한 포도주였다. 그라하는 짐작했다.
"술 먹자고?"
모험가는 잠시 눈을 굴렸다. 그리곤 그떡였다.
"그래, 좋아. 네가 도와주는 게 얼만데, 그 정도야."
알고 있었다. 잠든다고 표현했으나 사실 죽음에 가까웠다. 알라그가 사라진지 수천년이 지난 후에도 기술은 알라그를 따라잡지 못했다. 그 기술을 따라잡을 때까지 몇 천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인류가 크리스탈 타워의 힘을 바르게 쓸 수 있을 때까지 잠들어 있을 거야. 그는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웃어야 했다. 알고 있었다. 사람은 관계를 맺어야 살 수 있다.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이 죽으면 자신 역시 죽는다. 하지만 그는 살아 있을 예정이었다. 그들이 살아있을 때에는 죽어 있을 터였고 그들이 죽은 순간에는 살아있을 터였다. 타워의 가동을 멈추고 의식을 죽일 때까지도 눈물을 씹어삼켜야 했다.
그래서? 그런데. 난 왜 깨어 있지?
타워는 완벽하게 멈췄다. 수정이 어둠 속에서 흐리게 빛을 반사시켰다. 시르쿠스 탑의 수많은 계단을 천천히 오르던 그라하는 정상에 오를 때까지도 많은 가정을 세웠다. 그러나 쓸만한 건 하나도 없었다. 정지한 크리스탈 타워에서 보이는 하늘은 언제나 검었다. 낮인지 밤인지,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모르도나. 요마의 안개가 충만하고 온갖 요마들이 들끓는 곳이었다. 그런 곳의 한구석에 위치한 크리스탈 타워에도 에테르의 파편이 닿았다. 타워가 부실한지 구멍이 뚫린 부분이 있던 탓이다. 워낙 구석인데다 인적이 닿지도 않는 곳이라 사람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물론 그라하가 항상 깨어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원하지 않은 때에 깨어 느닷없이 잠들었다. 이상한 때에 갑자기 반짝 깨어 갑자기 시야가 핑 돌았다. 그건 수면이 아니었다. 따지자면 기절에 가까웠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원인은 알 수 없었다. 원인이고 자시고 항상 일정하게 빛나는 수정에 어둠만을 접하는데 뭘 알 수가 있어야지. 그렇게 그는 추측하기를 포기했다. 근거 없는 생각은 쓸모 없었다.
그가 깨어날 때마다 그는 몸이 무거워진다고 느꼈다. 사실이었다. 몸의 일부가 수정으로 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손끝이었고, 그 다음에는 손목까지였고, 그 다음에는. 허! 침식이라도 당하는 기분인데. 그는 헛웃었다. 이대로 영영 의식을 잃은 뒤에는 정말 타워에 삼켜질까, 같은 생각도 했다. 그래도 괜찮은가? 아닐텐데. 하지만 그는 곧 걱정을 거두었다. 그건 팔꿈치까지 수정으로 물들었을 때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