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랍
15.
백업!
사실 빠지는 거 좀 있을까봐 불안하긴 해요.
퇴고는 간단히! 맞춤법 검사 하지 않았습니다.
오르모험과 프레히카가 있습니다. 이 경우 모험가는 ★메테오(트레일러의 중원휴런)가 아닌 제 자캐★입니다!
프레히카의 경우 암기 50잡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해주세요!
하얀 숨이 붉게 일었다. 창백한 네게서 새는 피가 그렇게 선명했다. 너는 초점 없는 눈을 들어 날 마주한다. 너는 확실히 지쳐 있었다. 원체 창백한 편이었던 피부가 아예 병든 사람으로 보일 정도로 허얬다. 너는 더디게 움직인다. 다리가 저린 사람처럼 힘겹게 움직인다. 겨우 내 앞에 선 네게서 비린내가 났다. 진저리나는 쇳내음이 났다.
너는 웃었다.
무너져내린다.
*
의식이 흐렸다. 눈이 끔뻑거렸다.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눈이 뜨이면, 우선은 일어나는 것. 습관이었다. 팔을 디디려면 어깨가 움직이기 마련이다.
따가움. 온몸의 근섬유 사이사이에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있는 것 같았다. 허억.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눈앞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검은 기포가 떠올랐다가 다시 퍽 터져버린다.
모험가는 기억한다. 그곳에서 뻐적하고 갈라져 깨지는 듯했던 자신의 숨소리를. 너무 많은 부상으로 오히려 무감각해지기까지에 이르렀던 자신의 몸을. 시리도록 검어 상조차 제대로 맞춰지지 않던 자신의 시야를. 모험가는 익숙했다.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모험가는 항상, 거의 매번 전투마다 자신의 한계까지 몸을 망가뜨렸다. 정작 사람들은 단지 그가 행한 결과만을 놓고 평가했다. 모험가가 망가진 정도는 신경쓰지 않았다.
딱 한 사람을 빼고는.
모험가는 누워 있었다. 모험가에게는 조금 흰 이불이 천천히 지어지고 있는 참이었다. 그럼에도 모험가는 몸을 일으키지도, 돌아눕지도 않았다, 손가락 하나조차 끄떡이지 않았다. 그가 습관처럼 매만지고, 손질하던 조금은 낡은 창조차도 그의 옆에 놓여 있었다. 모험가는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모험가는 알고 있었다. 죽고 싶을 때 죽지 못함의 공포를 알았다. 자신의 어깨가 희망의 책임감에 짓눌리는 것을 알았다. 죽을 것만 같은 순간에도 죽지 못함을 알았다. 그렇기에 모험가는 자신이 죽지 않음을 알았다. 혹한의 지역, 커르다스에서 그가 그처럼 무모한 행동을 하고 있음은 그런 맥락에서였다. 눈보라가 아주 거셌다. 그런 날에는 마차도 지나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모험가는 아주 잘 알았다.
모험가는 지쳤나? 그런지도. 그런가. 모르겠어. 모험가는 자신이 몇 분간이나 그 자리에 누워 있었는지 잊었다. 조금 공기가 차가워졌음만 어렴풋이 느꼈을 뿐이다. 밤인가. 모험가는 짐작만 했다.
모험가는 문득 깨닫는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았다. 모험가는 종종, 그리고 자주 의욕을 잃곤 했다. 어디선가 퍼지는 초코보의 발소리가 모험가의 귀를 스쳤다. 모험가의 귀가 잠깐 쫑긋 섰다가 가라앉는다. 모험가는 부스스 일어난다.
진짜로 밤이잖아. 모험가는 그런 시답잖고 느긋한 생각을 했다. 쥔 창이 터무니없이 시려 모험가는 저도 모르게 오소소 떨었다. 그러나 모험가는 일어서지 않았다. 그냥 앉아있을 따름이었다. 어쩌면. 그래, 어쩌면. 점점 커지던 터벅거림이 바로 근처에서 멎었다. 모험가는 소리없이 탄식했다.
"메이아!!"
아니기를 빌었는데. 모험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철컥하는 소리가 울린다. 모험가는 겨우 목을 돌렸다. 목에서 뚜득뚜득하는 소리가 나는 걸 들으면서. 그는 퍽이나 다정해서, 굳이 무릎을 꿇어 저와 눈을 맞춘다.
"괜찮은가? 아니, 온몸이 붉잖아. 왜 이렇게 된 거야?"
모험가는 그를 마주하지 않았다. 모험가는 다시 침묵한다. 그저 어색하게 웃었을 뿐이다. 오르슈팡은 그에게 손을 내민다. 일단 돌아가자. 그가 덧붙이는 말소리가 눈보라의 소음에 가렸다. 모험가는 손을 들었지만 이내 다시 거두어버린다. 그는 그저 일어섰다. 그리고 따라 일어서는 오르슈팡을 멀거니 보고만 있었다. 그가 초코보에 올라 타라고 말하기 전까지 모험가는 그저 서 있기만 했다. 모험가는 온몸의 근육이, 뼈가 삐걱거림을 느꼈으나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모험가는 거의 늘 고요했다. 사실은, 그랬다, 그의 주변인 모두가 알던 사실은 그가 유독 말을 삼간다는 점이었다. 어떤 사실마저 곁에 있는 사람-거의 대부분 알피노-들이 전달했다. 모험가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일 것이다.
모험가는 알고 있었다. 온몸이 붉다고 말하는 오르슈팡도 실은 몸이 붉었다. 머리카락에 눈송이가 군데군데 엉겨 있었고, 그가 타고 온 초코보의 부리에 눈이 조금 쌓여 있었다. 오르슈팡은 꽤 오래 모험가를 찾았다. 모험가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으나 어떻게든 외면했다.
용머리 전진기지에 도착하고서 오르슈팡은 습관처럼 모험가에게 손을 내밀었다. 모험가의 눈에 순간 당황의 빛이 어리고서야 오르슈팡은 짧은,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손을 거두었다. 모험가는 아주 조금은 찜찜한 눈치로 초코보에서 내렸다. 오르슈팡은 초코보를 축사에 데려갔다. 모험가는 그 잠깐, 어쩌면 긴 시간동안 그저 서 있었다. 정말로 그냥 서 있기만 했다. 모험가의 머리 위에 다시 눈이 조금 쌓였다.
물론 오르슈팡이 초코보를 달래고 돌아와 모험가를 건물 내에 들였다. 사실, 그는 눈의 집에 들어가는 게 맞았으나, 모험가는 눈의 집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힘겨루기에서 순수히 힘만 놓고 본다면 오르슈팡이 모험가에게 이길 수가 없었다. 몸을 먼저 녹이고 싶은가. 그런 생각을 한 오르슈팡은 욕탕이 있는 쪽을 가리켰으나 모험가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이유를 물어도 모험가는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때문에 오르슈팡은 못 이긴 척 모험가를 데리고 전진기지의 건물로 들어와야 했다. 코랑티오는 없었다.
모험가는 테이블 앞에 앉아 웅크렸다. 잠시 건물 밖으로 나갔던 오르슈팡은 머그 두 잔을 들고 기지로 돌아왔다. 모험가는 코끝에 스치는 알싸하고 달달한 향을 좋아하지 않았다. 불이라도 놔주고 싶은데. 초에 불을 붙이며 한 중얼거림이었다. 모험가는 드물게 찌푸린 눈으로 오르슈팡을 쳐다봤다. 오르슈팡은 갸웃거렸다.
"당신도. 차가워."
모험가의 말은 뚝뚝 떨어진다. 오르슈팡은 아주 잠깐 굳었다가 모험가가 시선을 거두고서야 움직였다. 모험가는 말을 아꼈고, 그 탓에 하는 말이 지나치게 함축되어 있곤 했다.
오르슈팡은 책상에 앉아 펜을 집었다. 한동안 묵직하고 가벼운 필기소리와 나긋한 팔랑거림, 이따금 지나치게 성이 난 바람의 소리만이 실내를 간간이 채웠다. 일렁이는 노란 불꽃, 검은 실내. 모험가는 그런 걸 싫어하고는 했다.
"왜 그랬어요."
오르슈팡은 문득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모험가는 아주 조금 전과 똑같이 웅크려 있었다. 어쩌면 환청이 아니었나, 오르슈팡은 그런 생각을 했다. 무엇이 말이지? 오르슈팡은 목에서 끓던 소리를 겨우 삼켰다.
"나는 널 좋아해. 난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럴 수 밖에 없었어."
다시 고요가 가라앉는다. 조금은 무거운 공기가 엉겨붙는다. 모험가의 귀가 움직였다. 모험가의 고개가 기우는 걸 오르슈팡은 보지 못했다.
"내게 가치가 있어요? 그럴 정도의."
오르슈팡은 글씨가 조금 번진 것을 봤다.
"충분히."
차고 넘칠 정도로 있네. 다시 서걱이는 소리가 났다. 모험가는 말하지 않았다.
모험가는 문득 자신에게서 눈물의 내가 나는 것 같다고 느꼈다. 기분탓으로 치부한 모험가는 눈을 감았다. 얼었던 감각들이 차츰 돌아와 전신이 홧홧해짐을 느끼면서도 그랬다. 모험가는 그대로 얼어붙은 사람처럼 잠기다가 깨어났다. 커르다스 건물의 문은, 아무리 곱게 닫아도 반드시 쇳소리가 나기 마련이요, 모험가의 귀는 아주 작은 소리마저 잡아낼 정도로 예민했기 때문이다.
모험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르슈팡은 그것에 익숙했다. 모험가는 사내가 배려심이 깊은, 올곧은 사내임을 알았다. 그렇기에 자신의 침묵에마저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이리라고, 모험가는 생각한다.
식었어. 모험가는 오르슈팡이 제 앞에 놓아준 머그를 쥐곤 손잡이를 엄지로 쓸었다. 사실, 모험가는 지나치게 뜨겁고, 차가운 것을 잘 먹지 못했다. 그러나 모험가는, 커르다스에서 장작이 귀하다는 것을 알았다. 모험가는 불편했다. 모험가는 식은 차를 한 숨에 들이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차에 바늘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모험가는 일어섰다. 지나치도록 얼얼해진 몸뚱이를 어떻게든 질질 끌어 움직였다. 어느 샌가 눈보라가 조금 누그러든 것 같다, 모험가는 그렇게 생각한다. 모험가는 다시 우두커니 선다.
모험가는 유독 상념이 많았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을 모험가는 굳이 끊어내지도 않았다. 모험가는 자신이 정의롭지 않은 사람임을 알았다. 때문에 불편했다.
눈이 뻐적거렸다.
사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귀찮아졌다. 굳이 따진다면 그렇게도 말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모든 행동에 진저리가 났을 따름이다. 그래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올 말도 삼키고, 나오지 않을 말도 삼켰다. 속에서 말들이 썩어가더라도 나는 굳이 눈을 돌렸다. 목을 타고 기어오르는 지독한 썩은내에 항상 머리가 아팠다. 그렇더라도 그랬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
이슈가르드는, 거의 늘은 아니더라도 눈이 밟히는 곳이다. 더군다나 볕이 제대로 들지 않는 거리는 거의 사시사철 눈이 뻐적거린다고 생각할 곳이었다. 그러니까, 가령, 구름안개 거리는 그랬다. 빈부격차가 울다하만큼 심할 이슈가르드에서도 빈민층은 있었다. 그들이 모여사는 구름안개거리는 복지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가려진 거리. 입 안이 쓰라렸다.
문득 고개가 돈다. 미심쩍은 얼굴을 한 그가 보인다. 그는 거의 늘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다. 그의 눈이 잠깐, 아주 잠깐 커졌다가 다시 가늘어진다.
"뭐야. 니가 여기 왜 있어?"
"당신을 보러."
"징그러운 소리는 집어쳐."
웃는다. 그의 신이 짤각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를 보러 거리에 발을 돌린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슈가르드에는 단지 마물의 토벌서를 받으러 온 것 뿐이었다. 그가 떠올라서 보러 온 것 뿐이었고… 그러나 사실이기는 했으니.
"밥은 먹었어요?"
"당연히 못 먹었지."
"먹고 싶은 건?"
"고기."
"범위가 너무 넓다니까."
"고기면 돼."
나는 실은, 네 이름이 생경하다.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때문에 네가 낯설었다. 하지만 넌 날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것 같다.
아 이거 프레히카인가봐
모험가는 꽤 신출귀몰하는 사람이었다. 눈에 띄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그저 타인보다 발걸음이 상당히 빠른 편이었고, 말보다는 행동이 앞선 사람이었던 것 뿐이다. 때문에 그의 일행은 빈번이 모험가를 놓쳤다. 모험가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고는 했다. 가령 지금처럼.
모험가는 우뚝 서 있었다. 커르다스 서부고지는 커르다스에서도 유독 매서운 곳이었다. 그럼에도 모험가는 얼어버린 강 위에 그저 창 한 자루를 든 채 서 있기만 했다. 그의 머리카락이 피로 엉겨있는 걸 봤다. 군화가 쩔걱이는 소리에 모험가는 귀를 움직였다. 고개가 돈다. 프레이? 모험가의 말소리가 눈발에 흐렸다.
"왜 여기에 있습니까."
"그냥 좀."
모험가는 얼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다간 손을 거뒀다. 프레이는? 나는 당신을 찾으러 왔어. 프레이는 말을 삼켰다. 모험가의 앞에는 죽은 아르케오니스가 두 마리 있었다. 모험가는 프레이의 시선을 좇다 말고 살풋 웃었다. 무안함, 혹은 민망함, 머쓱함. 프레이는 그런 감정을 읽었다.
"의뢰야. 그냥 별 거 아닌 의뢰."
모험가는 프레이가 말을 붙이기 전에 선수를 친다. 보수는? 또 봉사하듯 하는 의뢰는 아니겠지? 프레이는 눈을 꾹 감았다. 널브러진 아르케오니스ㅡ그것도 언뜻 봤을 땐 몰랐으나 덩치가 꽤 큰ㅡ 둘을 가만히 보던 모험가는 고개를 돌려 프레이를 마주했다.
"얘, 고기는 맛있어?"
"네?"
"난 먹어본 적 없어. 넌 이슈가르드 사람이니까, 혹시나 해서."
고기는 가게에서 못 봤는데. 모험가는 중얼거린다. 프레이는 눈을 깜빡였다. 모험가는 칼을 꺼내다 말고 다시 접어넣었다. 모험가는 프레이를 쳐다봤다. 프레이는 문득 눈을 가늘게 떴다.
"뭡니까."
"도와줄 수 있어?"
허. 모험가는 어색하게 웃는다. 모험가는 아무데서나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하루에 국경 두세 개는 가뿐하게 뛰어다녔다. 그렇다보니 여간 주리지 않고서는 배를 채우지 않았고, 채울 기회가 생기면 그제야 대충이나마 무언가를 들이곤 했다. 모험가에게는 지금이 그랬다.
프레이는 어렴풋이 눈치챈다. 모험가가 맡은 의뢰는 아마 가죽이다. 그래서 먹을 생각도 했겠지. 평소에는 앉은 자리에서 바로 손질해 먹기도 하던 그였다. 그러나 막상 곁에 누가 있으니 피냄새에 짐승이 몰려올까 걱정이 올라왔을테고, 하지만 저 혼자 저 둘을 옮기자니 가죽이 얼음판에 끌려 질이 낮아질테고. 모험가가 도움을 요청함은 다름 아닌 운반일 것이다.
"당신, 초코보는 둬서 뭐합니까?"
"그 아이에게 이 덩치 둘을 맡길 순 없잖아."
"저는 부려도 괜찮고요?"
모험가는 다시, 난처하게 웃는다. 춥진 않습니까. 프레이는 팔을 얽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 모험가의 귀가 언뜻 살랑거렸다. 어깨만 한번 오르내린다. 혹한에 오랜 시간 내던져진 몸은 감각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모험가는 알고 있었다.
"차라리 여기서 토막내시죠."
설령 마물이 다가오더라도 좋습니다. 당신이 암흑에 얼마나 익숙해졌는지 볼 기회가 될 테니. 모험가는 눈만 깜빡이다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칼을 꺼내었다.
모험가는 그리 살가운 사람은 아니었다.
이따금 숨이 막혔다. 그럴 때마다 창을 떨어뜨리고 주저앉아 숨을 죽였다. 눈앞이 핑 도는 순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온몸의 피가 갑자기 멈춘 기분이었다, 심장이 겨우 쥐어짜내어지고 있는 듯한 불쾌함이 퍼졌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면 목이 손자국으로 붉었다. 정확히는 거의 멍처럼 푸르렀다. 때문에 나는 곧잘 목을 가리고는 했다.
웃기는 일이지. 날 사지로 내모는 건 숱하게 하는 인간들이 내가 조금이라도 다치면 화들짝 놀랐다. 아프면 쉬라고 했다. 쉴 순간은 없었다. 쉬려고 하는 순간 등 뒤로 쏟아지는 질책의 시선이 역겨웠다.
이프리트의 지옥불은 어떻게든 견뎠더랬다. 모닥불에서 튀는 불씨는 언제 닿아도 따갑다. 움찔한다. 고개를 든다.
악귀의 위장. 마물이 득실거린다는 중앙고지의 동굴. 동굴이니만큼 바람은 불지 않았다. 그러면 된 일이다. 눈이 깜빡인다.
모험가는 이따금 꿈을 꾸었다.
*
꿈 속의 너는 머리가 없었다. 그러나 당연하게 느껴졌다. 꿈은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듀라한도 몇 번인가 보고, 머리가 잘려나간 시체도 몇 번인가 봤던 시선은 목 없는 갑주에 놀라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왜인지 그게 너라고 생각했다. 안녕. 어색하게 웃었다. 네가 절걱이며 다가왔다. 네 팔이 무언가를 안으려는 것처럼 뻗었다고 생각했다. 너는 날 안았던 것 같다. 으스러뜨릴 것처럼.
원망. 딱 그런 단어로 표현이 됐겠지. 나는 그대로 내가 부러져버렸으면 좋겠다, 싶었다. 널 무시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놓고. 그렇다면 네게 죽는 것도 이치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너는 곧 힘을 풀었다. 네게 머리가 있었으면 내 어깨에 닿았겠다는 시답잖은 생각을 한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네가 체중을 실어 날 밀어도 나는 가만히만 있었다. 쓰러진다. 바닥에 부딪치는 충격 대신 물에 빠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눈이 뜨인다. 보이는 건 갈색 천장이었다. 부스럭거린다. 눈을 깜빡인다. 추워.
알라미고의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것 같았다. 빌어먹을 새벽은 그제야 날 놓아줬다. 나는 영웅이 아니야. 나는 진심으로 지껄였는데, 그들은 농담을 한다며 웃었다.
링크펄이고 링크셸이고, 크리스탈을 전부 깨뜨렸다. 빛의 전사가 나 뿐인가. 아니겠지. 그러자 모그리가 날 찾아오고는 했다. 한번 북 뜯어 읽다간 괜한 신경질에 선 채로 갈기갈기 찢었다. 돌아가려는 모그리를 붙잡고 말했다. 네 친구들에게 전해. 다시 이딴 멍청한 편지 전달하러 오면 폼폼이 뜯길 거라고 해. 너희에게 편지를 맡기는 인간들한테도 똑같이 말해.
의뢰 목록을 천천히 훑는다. 뻔한 상술같은 미신과 이벤트와 유행은 진저리가 난다. 돈 벌기엔 딱 좋은 명목이지만. 재료를 갈무리하고 망치를 움직인다.
모험가는 이따금 이명을 듣는다. 그러나 저에게만 들리는 소음이기에 얼굴만 찌푸린다. 삐이이, 하는 소리는 낮게 깔리다 이내 커져 말소리를 전부 덮어버리고는 했다. 모험가는 귀를 막는다. 소용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모험가는 때로 숨이 막혔다. 무언가 짓누르는 것처럼, 있지도 않은 물에 빠져버린 것처럼 허파가 제 생각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핑 도는 시야에 무언가 제대로 담기는 일은 없었다. 그는, 초월하는 힘을 가진 빛의 전사였으나 본질은 인간이었다. 모험가는 눈을 감았다. 아니, 닫아버렸다.
그건 주기가 없었다. 때문에 모험가는 난처했다.
"별 거 아니에요. 정말로."
"당신, 방금 죽을 사람처럼 굴었습니다."
"가끔 그래. 진짜 별 거 아니에요, 안 죽었잖아요."
나는 투구 너머에서 그가 무슨 얼굴을 하는지 잘 모른다. 보여주질 않으니 알 턱이 있어야지. 그러나 눈치 정도는, 그간 입을 닫고 지낸 세월이 있는 탓에 어느 정도는 트여 있었다. 그러니, 그가 어이가 없다는 눈치임을 알았다. 터무니없는 소리다. 하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가끔? 당신에게 가끔은 도대체 몇 번입니까? 당신, 분명히 저번에 내게 가끔만 남을 돕는다고 했죠. 당신은 거의 늘 그러잖습니까!"
"그거랑은 맥락이 조금 다르잖아."
"아하. 맥락이 다르다. 뭐가 다릅니까."
당신은 항상 괜찮다고 말하지. 괜찮은 건 괜찮은 게 절대로 아니잖아요.
맞는 말이다. 속이 쓰렸다.
"그래도 정말 괜찮아."
"당신… …하. 됐습니다. 하지만 대답하세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랬습니까."
실은 당신도 익숙해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핏내음은 쉽게 감추어질만한 것이 아니다. 독한 철내음은 호수에 몸을 빠뜨려도 도무지 가시질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대로 왔다. 어차피 이슈가르드에는 텔레포로 오는 일이고, 구름안개거리로 오는 길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으니까. 하지만 당신의 반응을 봐서는, 역시 씻고 오는 게 나았을지 모른다.
당신의 환술은 서투르다. 임무에서 만났던 치유사들에 비해서는 그랬다. 당신은 본래 지키는 사람이었지, 치료를 도맡던 사람이 아닌 탓이었을 테다. 당신은 말하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입을 다문다. 해야하는 말이었을까. 나는 줏대를 잃은지 오래였다. 잘게 떠는 손을 맞잡아 억눌렀다. 당신은, 아마도, 눈치챘겠지만 침묵했다.
순식간이었다. 아마도 치유사의 실수. 누군가 쓰러지는 것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는 일은 익숙하지 않다. 마물이 내게 머리를 돌리는 것을 봤다. 할켜진 팔이 여즉 쓰렸다. 말끔히 치유되었을텐데도.
치유술은 심신의 안정에도 도움이 된답니다. 헛소리였다. 생각이 생각으로 뒤엉킨다. 범람하는 잡념은 이따금 정신을 갉아먹곤 한다. 그대로 휩쓸려버릴 듯 어지러웠다. 눈앞에 검은 기포가 터지는 착각이 들었다. 문득 고개를 돌렸다. 치유의 빛은 어느 샌가 사그라들어 있었고, 당신은 미심쩍게 날 보고 있었다. 웃는다. 나는 당신의 표정을 잘 보지 못한다. 당신. 당신의 말소리는 짧다. 당신의 눈이 구르는 걸 봤다. 무언가 말하기를 주저하는, 말을, 문장을 고르는 사람이 지금 당신처럼 행동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당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고작 그렇다.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누른다.
"왜?"
"당신은 곧잘 거르곤 했지요. 기운도 없어보이고."
"기억 안 나요."
당신이 무어라 한 것 같은데. 사실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문득 당신이 어찌 내게 이렇게 자세하고, 친절한지 의문이 들었을 따름이다.
"… 듣고 있습니까."
"미안해요, 못 들었어요."
"이번에도요."
"미안."
"그 미안은 입에서 떨어지질 않는군요."
사실 나는 당신이, 네가 이미 알고 있는 건 아닌가한다. 너는 생각보다 짓궂고는 했으니. 네가 모른 척에는 도가 텄다는 걸 잘 알았다. 흩어지는 숨이 희었다. 저 멀리서 꼬마들이 일없이 눈을 던지며 소리가 들렸다. 눈덩이가 날아올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너는 견디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도망을 쳤으면 쳤지 맞서는 사람도 아니었고. 나는 네가 매 순간마다 느끼던 두려움을 기억한다. 그 지옥보다도 더 뜨거웠을지 모르는 화염 속에서의 공포를, 골이 울리다 못해 뇌까지 터져버릴 것 같던 진동에서의 공황을, 온 근육이 찢길 듯한 바람 속에서 삼키던 울음소리를 기억한다. 너는 하이델린을 저주했다. 너는 많은 사람을 지키는 동시에 원망했다. 나는 이따금 네가 죽음을 갈망하던 순간을 안다.
하지만. 그래서? 내가 아는 너는 네가 아니지. 그렇기에 나는 널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다. 나는 네게 강요할 자격이 없다. 너는 어느 순간부턴지 내게서 멀어졌다. 그래서 내가 곱씹던 너는 네가 아닐 것이고… 사람은 성장하기 마련이다.
문득 곁에서 뜨뜻한 김이 오른다. 무심코 시선을 옮기니 네가 있었다. 그래, 너는 일상에서조차 걸음을 죽인 사람이 되어버렸다. 너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손을 까딱인다. 안 먹어? 넌 말이 없는 사람이라, 눈으로만 그렇게 말한다.
"나는 괜찮습니다. 당신이 드세요."
너는 석연찮게 날 보다간 그대로 벽에 등을 붙이고 선다. 아니, 미끄러져 앉는다.
나는 언제나 외로웠다. 그럼에도 당신과 함께한 나날이 그립지 않았다.
*
뿌득, 빠드득, 나뭇가지는 쉽게도 부러진다. 장작이라면 나무를 패도 좋을 일이건만, 어쩐지 꺼림칙한 일이었다. 타닥타닥 불망울이 피어오르는 모닥불 위로 가지를 던진다. 훅 내려앉던 불길이 야금야금 장작을 먹는다. 나는 그걸 멍청히 보고만 있었을 뿐이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을 테다. 불이 뒤척이는 소리, 밀의 낮은 숨소리, 저 멀리 어딘가에서 울리는 벌레들의 울음소리, 물줄기가 뛰어가는 소리 따위는 사실, 없는 것처럼 대해도 좋을 것들이다. 달빛이 시렸다.
달을 지키는 사람. 내 선조들이 그랬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달을 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데. 가방을 뒤적인다. 의뢰 목록을 살핀다. 펜촉을 갈아끼울 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맹맹한 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었구나쿠뽀!"
헛웃음이 새었다. 생각없이 손을 들어 가방을 받친다. 배달부 모그리는 주섬주섬 가방을 뒤적여 내밀었다.
"모험가님께 편지가 왔다쿠뽀!"
"집에 줘도 되는데."
"나 참, 모험가님 우체통은 모그가 꽂은 우편물로 꽉 찼다 쿠뽀! 확인 안 한 거지쿠뽀!"
"하긴 해. 미안."
거짓말. 집에는 사흘에 한 번 들어가면 자주 들어간 거다.
까맣게 타버릴 거예요
*
나는 항상 네가 죽기를 바랐다. 한 치의 망설임없이, 매일, 모든 순간에 네 죽음을 갈망했다. 단지 그게 네게 크나큰 절망이 되지 않기를 빌었다. 네가 죽음으로써 평안을 얻기를 원했다. 이기적인 소망임을 알면서도 그랬다. 그래서? 결과는. 썩 좋지는 않았다.
나는 언제나 희생양이었지.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일테다.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여름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었다. 겨울이, 가을이, 봄이, 기억나지도 않을 정도로 아득해졌다. 겨울의 시린 공기는, 가을의 청명함은, 봄의 간지러운 공기는. 그리도 낯선 단어들이 된다. 우리는, 여름임에도 긴 소매를, 후드를 눌러쓰는데에 익숙해졌다. 더운 공기에 익숙해졌다.
너는 아마, 알고 있을 테고, 모르고 있을 테다. 그렇기에 난 네 안녕과 죽음을 동시에 빌었다. 나는 네가 내 죽음을 목격하지 않기를 바랐고, 네가, 기왕이면 그 순간이 오기 전에, 우연한 사고로라도 죽기를 바랐다. 고통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정말로.
가로등이 깜빡였다. 문득 서 있음을 깨닫는다. 주위를 둘렀다. 좁은 골목, 환풍기 따위가 보였다. 파이프가 얼기설기 얽혀 있었다. 괜히 불안이 피어오른다. 길은 어차피 통하게 되어 있다. 어디로 걷든 환한 길은 나오기 마련이며, 어두운 길 역시 접할 수 있다. 시각은, 하늘의 색으로 보건대, 아마 9시 언저리였다.
스산한 골목을 걷는다. 이런 곳에서 그가 말을 걸고는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을 되짚는다. 그가 날 찾던 시기가 어느 정도였지. 떠오르지는 않았다. 리셋이 언제 이루어졌는지도 가물거린 탓이다. 시간을 계산할 수도 없을 정도로 내 몸은, 머리는 망가졌다.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네 생각만큼 이타적이고 살가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저 그런 사람임을 연기하고 있었다. 너는 나를 알까. 아니겠지, 네가 달라진 만큼이나 나도 달라졌을 테다.
"모기에 물려도 난 몰라요."
사실, 폭염 속에서 모기는 죽어나간다. 그냥, 그 얘긴 구실이었을 뿐이다. 너는 웃는다.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모르겠지. 나는 얼마나 말 못할 피로에 찌들었는지 모를 너를 찾았을 뿐이다. 그 앞에 쪼그려앉아있다가 살그머니 일어나 네 머리카락을 훑다가, 네 뺨을 만지다가, 이게 뭔 짓인가 싶어 속삭였을 뿐이다. 까물까물 일어난 네가 엉뚱한 얘길 해도 그저 웃기만 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알바 일찍 끝났어?"
"아. 그만뒀슴다."
"뭐? 왜?"
웃는다. 별 말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냥, 찜찜하게 웃는 방법만이 남을 뿐이다. 속내를 알기는 어려웠을 테다.
"그냥. 선배랑 사장이 짜증나서요."
"뭔 일이래. 그 정도였어?"
"네, 뭐. 좀 그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