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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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진 반년에 한번씩 백업하러 오는 것 같아요
빛전수정...히카수정....모험수정....뭐라고 표기해야할지 모르겠는 그 커플링은 당연하게도 5.0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모먼트가 뭐든 거기서 거기로 비슷비슷한 건 제가 보고 싶은 장면이 있는데 으아아 이게아니야(쨍강)하며 엎은 것들이라서 그래요...
참 이 글의 빛전은 메테오(트레일러의 중원 휴런 남성)가 아니라 제 자캐입니다. 남코테예요. 그치만 음.....그게...두드러지는가? 하면 잘 모르겠어요
퇴고! 안 했습니다! 내가 늘 그렇지! 오타나 나중에 이거 수정하자 라고 붙여둔 괄호따위의 혼잣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이타마가 선 주변은 잔해 뿐이었다. 순간 그는 여기가 원래 황무지였나, 싶었다. 도시에는 콘크리트 잔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먼지들. 이상하네, 분명 이쯤이 U시일텐데. 아니, 분명 L시 옆동네가 U시였으니 그가 선 곳은 U시가 맞았다. 그런 결론에 다다른 사이타마는 그저 걸었다. 진짜 아무것도 없네. 뭘 하면 이렇게 된담. 사이타마는 태평하게 생각했다. 도시의 주민들은 진즉 대피했다고 보고됐다. 그러니까, 사상자는 없을 테다. 있다면야 아마도 히어로다.
전기가 빠직이는 소리가 났다. 사이타마는 그래서 멈춰섰다.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 찾는 사람처럼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문득 그는 몇 걸음 걸었다. 허리를 숙여 땅을 툭툭 쓸었다. 무언가 드러났다. 먼지에 덮여 빛을 제대로 반사하지 못하는 철덩어리가 있었다. 사이타마는 아예 앉아 그 주변을 쓸었다. 제노스였다. 였을, 것이다. 그가 부서지는 일은 예사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심한 손상은 손에 꼽혔다. 하체는 어디 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고, 팔이 있었을 어깻죽지도 녹아 있었고... 사람으로 치면 폐가 있을 자리 언저리가 삭아 코어가 드러나 있었다. 그의 하관이 없었다. 눈이 녹아 있었다. 제노스? 사이타마가 중얼거렸다. 코어가 흐리게 빛났다. 정제되지 않은 소리가 잡음처럼 헤엄쳤다. 괴인은? 기계는 침묵했다.
사이타마는 기계를 들어올렸다. 꼭 품에 들어가는 게 물건같았다. 딱, 애매하게 많은 짐을 끌어안은 모양새. 기계는 맥없이 사이타마에게 안겼다. 그는 그대로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허공을 응시하던 그가 천천히 걸었다. Z시 반대 방향이었다. 그리고 한참을. 걸었다. 기계는 끊긴 전선에서 스파크가 이는 걸 느꼈다. 어디선가 기름 냄새가 번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어둠에 갇힌 시야에서 의식이 깜빡깜빡 명멸했다. 문득 불안했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어느 순간에 사이타마가 속삭였다. 제노스. 데려다줄게. 맞으면 끄덕여.
사이타마는 0부터 9까지의 숫자를, 기계가 주억거릴 때까지 읊었다. 맞다고 하면 다음 자리 숫자로 넘어갔다. 그는 그런 식으로 귀찮은 일을 했다. 이게 끝이야? 그렇구나. 기계는 가벼운 철판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다이얼 따위가 눌리는 소리를 들었다. 응, 네가 박사야? 제노스가 다쳤어. 어디 살아?
그래서, 망가진 기계는 연구실로 옮겨졌다. 크세노 박사는 제노스가 그렇게 망가진 건 처음이라고 했다. 수리에 며칠 시간이 걸린다는 말에 사이타마는, 그래? 그럼 나 먼저 갈게. 하고 돌아나왔다.
*
콜록.
엥? 뭐야. 사이타마는 손등 위로 하늘하늘 내려앉은 꽃잎을 봤다. 꽃 같은 건 없었다. 남정네 둘이 사는 삭막한 방에 그런 게 있을 턱이 없다. 창문을 열어놨나? 아니었다. 사이타마는 그제까지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디서 붙어온 거겠거니, 하고 말았다.
사이타마는 문득 일어나 앉았다. 슬슬 제노스가 돌아올 것 같은데. 선생님. 제노스는 곧게 앉아 우직한 목소리로 사이타마를 부르곤 했다. 소리가 귀에 박혔나, 사이타마는 난데없는 허전함을 느꼈다. 괜히 귀에 손가락을 넣던 사이타마는 금방 일어섰다. 장을. 보러 가야지. 사이타마는 어슬렁거리며 현관에 섰다. 대충 신발을 구겨신곤 문을 열었다. 문을 닫았다. 고개를 돌리면 제노스가 서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없었다.
많이 다쳤었지. 돌아오면 좋아하는 거라도 먹이자. 사이타마는 그런 생각으로 마트 내를 휘적이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사실은, 제노스가 무얼 좋아하는지 몰랐다. 정어리 통조림? 그런 건 사다 주면 끝이잖아… 젠장, 좀 물어봐둘걸. 생각해보면 제노스는 제 얘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이타마는 곧 제 과거를 길게도 늘어놓던 제노스를 떠올렸다. 그래, 이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그런 자기합리화를 한 사이타마는 달걀을 집었다. 그리고 정어리 통조림도 챙겼다.
밤하늘이 옅었다. 막 기울어가는 해는 자색이었다. 붉은 색이 점점이 갉아먹혀 죽어가는 시간대였다. 사이타마는 스러져가는 땅거미를 가만히 보다간 몸을 틀었다. 콜록. 점점이 붉은 잎이 흩어졌다. 사이타마는, 감기인가, 하고 말았다. 나오지도 않은 코를 킁, 들이마신 그는 고요한 거리를 걸었다. 사람은 물론 없다. 하지만 동물까지 없었다. Z시의 무인거리는 그랬다, 숨 막혀 죽을 듯한 고요. 누군가 비명을 지르더라도 반응 없을 거리. 그래서 더 인적이 없으려나. 사이타마는 혼자 갸우뚱거렸다.
나는 종종, 그리고 가끔, 또 자주 너의 꿈을 꿨다. 나는 몰랐어. 네 주변에는 사람이 머무른다. 너는 말이 적은 편이었다. 침묵이 그리도 많은 의미를 가지는 줄 몰랐다. 내가 네게서 뭘 봤지? 나도 네 곁에 있고 싶었는데. 사람들은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나보지. 나는 네가 희망이라고 생각해. 네가 한없는 나락에 떨어져 절망하더라도 그랬다. 모두가 널 보고 앞으로 나아갈 의지를 가졌다. 그건 네게 좋은 일인가? 네가 우는 순간에도 다른 사람들은 네게서 미래를 보는 게. 네게는 재앙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가끔.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는 가라앉고 있어. 고인 시간 속에서 끝없이 사고하며 침잠하는 사람일 뿐이다. 나는 어리석었어. 후회하진 않는다. 내 선택은 분명히 옳았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럴 줄 몰랐던 것 뿐이야. 분명 타워의 시간은 멈췄고, 나는 잠들어야만 했는데 깨어있었다. 한 순간이 영겁같았다. 시르쿠스 탑의 계단 수를 세기를 몇 번, 고대인의 미궁에서 알라그 건축 양식을 연구하기도 몇 번. 부질없었다. 잠들어도 개운하질 않았다. 애초에 내가 잠이 들긴 했나? 그저 눈을 감았다 뜬 건 아닌가. 하늘은 언제나 눈부신 붉은색. 삼켜버릴 것처럼 새파란 빨강과 눈이 탈 듯이 쨍한 노랑.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는 서 있었다. 깨나 난감하다는 눈치로 내리는 비를 멀거니 보고 있었다. 아침부터 내리 온 비였다, 그는 분명 우산이 있었다. 그래, 한 30분 전까지는 그랬지. 그는 갑자기 우산이 없는 사람이 됐다. 바로 코앞의 건물에 편의점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비는 꽤 거셌다. 그는 그래서 서 있었다. 조금이라도 비가 잦아들기를 바랐다. 그러나 좀체 가라앉을 기미가 없는 빗줄기를 보며, 그는 얕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의 옆엔 어느 샌가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딱히 흔하지는 않을 다홍빛 머리카락이었다. 빨갛고 푸른 눈이 그를 보다간 돌았다. 팡, 우산을 펴는 소리가 났다.
"어디까지 가?"
그때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저보다 좀 더 작은 키의, 또래처럼 보이는 남성이었다. 우산은 그리 작지는 않았다. 22호관, 그는 얼결에 대답했다. 남성은 웃었다. 바로 앞이네. 같이 가자. 그는 마냥 당황스러웠으나, 애써 온 기회를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이상하게 떨떠름한 눈치로 고개를 끄덕였다. 찰박, 발을 내자마자 우산 위에서 빗방울이 뛰어다녔다. 꼭 10대 초반의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뛰놀듯이.
건물은 정말 코앞이었던지라, 그는 곧 '22호관'에 도착했다. 감사합니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냐, 괜찮아!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남성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음료라도 사드릴까요? 말을 들은 남성은 손사래를 쳤다. 5분 정도 씨름하고서야 남성은 겨우 제 이름만 알려주곤 도망치듯 가버렸다. 곧 다시 만날 거라고. 그때 뭘 해주든 하라고.
*
그가 이 일을 거의 잊었을 즈음이었다.
아. 아. 아아. 아. 아. 나는 이걸 안다. 태엽이 다 닳아가는 인형이다. 온몸의 관절이 삐걱대고 있었다. 아니면, 술에 애매하게 취해 균형이 안 잡히는 순간들. 물론 취하지 않았다. 그저 피곤해서다. 졸려서다.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다. 사방이 탁 트인 곳만 아니라면 진작에 바닥을 기었을 테다. 발이 몸뚱이를 이끄는 것 같았다, 기계적으로 발을 디디면 다시 한쪽 발을 디디고 있었다. 당장 드러눕고 싶다. 잠깐이라도 좋다. 잠깐만. 잠깐만.
잠깐. 드러눕지 못할 이유라도 있을까? 멈춰섰다. 나는 악착같이 기삿거리를 찾아다녔다. 전장에도 나갈 정도로. 그 피비린내 나는 현장에선 온몸에 먼지가 달라붙는다. 그 정도도 숱하게 겪는데, 고작 땅바닥에 쉬는 정도를 못해서 쓰나. 그런 생각에 당장 주저앉았다. 좀 살 것 같았다. 몸의 근육들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눈이 까물까물 감겼다. 안 되는데. 잠들면 안 되는데. 집에 가야 하는데, 흉흉한 소문이 도는데.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몸의 감각이 옅어졌다. 수마, 그 상냥하고 잔악한 것이 이윽고 찾아왔다. 의식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았다. 현실과 의식. 그, 애매하고 모호한 경계에서. 클리브. 문득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낮은 속삭임에 눈을 떴다. 갈색 구두엔 흙먼지와 검은 자국과... 자잘한 흠집이 많이도 남아 있었다. 그건 정말 낮은 속삭임이었다. 어떤 사람이든 이름이 불리면 반사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그런 것이다. 내가 문득 머리가 거의 잠겼다가 끌어올려진 건 그런 이유다.
"클리브. 일어나."
낮은 목소리였다. 숨이 꽤 많이 섞이고, 웃음기가 아주 조금 서린. 바닥을 기는 듯한, 그보다는 무언가를 긁는 듯한. 그 목소리에 문득 잠이 가셨다. 이상했다, 내 지인 중엔 그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없었다. 요즘엔 누군가의 뒤를 캐지도 않아서 화를 살만한 일도 없었다. 아니, 그렇더라도 대상의 목소리 정도는 기억할 수 있었다. 낯설지는 않았다. 낯설지는 않다. 그래서? 그러나 기억에 없었다. 고개를 들려 했다. 움직이지 않았다. 몸 전체가 그대로 딱딱하게 굳은 것 같았다. 손가락조차 까닥일 수 없었다. 오한이 일었다. 그거 들었수, 기자 양반? 이 근처서 살인마가 나온대지 뭐야. 세상에, 얼마나 성질이 나쁜지, 그게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래! 저쪽 제니는 목격자였는데, 요즘도 고기만 보면 토한다더라구. 당신도 조심해, 당신처럼 잘생긴 사람이 죽으면 안 되잖아! 그 말을 흘려듣는 게 아니었는데. 몸이 차가웠다.
시야의 인영이 쪼그려앉았다. 그의 코트가 검었다. 검붉었다. 저걸 안다. 피다. 말라붙은 피가 저런 색이었다. 이제사 곁에서 혈향이 나는 게 느껴졌다.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죽여달라고 하는 거랑 뭐가 달라. 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귀 끝에 머물렀다. 누군가 낮게 웃는 소리가 났다. 이 자는 살인마인가? 내게 뭐라도 있었다면. 아니, 하다못해 몸이라도 움직일 수 있었다면. 웃음이 갑자기 멎었다. 공기가 써늘했다.
"네가 여기서 죽으면 안 되잖아, 클리브."
그러니. 일어나야지. 무언가 뺨에 닿는다. 뭉툭하고 거칠고 끈적했다. 혈향이 짙게 나는 것 같았다, 그건 아마 손이었다. 문득 손끝이 움찔했다. 헉, 숨을 크게 들이켜니 인영이 없어졌다. 손이 축축했다. 벽을 짚고 일어서려다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주저앉았다. 목이 건조했다. 숨을 삼키자 뻐적 마른 목이 맞부딪쳤다. 겨우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피곤해서 그렇다. 피곤해서 꿈을 꾸는 거야. 피곤해서. 시야가 뒤집혔다.
쾅쾅쾅! 무언가를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흠칫 정신을 차리니 소파에 누워 있었다. 어? 기억이 없었다. 머리가 쨍했다, 누가 치기라도 한 것처럼.
그 방으로 가는 길은 파랬다. 굳이 따지자면 눈이 부셨다. 크리스탈이 희게 빛나는 공간이었다.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곳이니 당연했다. 하지만 모험가는 그 길을 걸을 때마다 어쩐지 입술을 꾹 물고 있었다.
"불편해?"
방에 와서 문을 닫는 네게 그렇게 말하면. 너는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깜빡인다. 나는 네 생활 습관을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네가 어딘가에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늘 문이 소리가 나지 않게끔 조심스레 밀어닫는 습관이 있다는 것도, 들어오는 김에 손을 등에 진 채 문을 닫는 버릇이 있는 것도 몰랐다. 영웅의 모든 게 하나하나 책에 쓰일 수는 없다. 그런 거지. 너는 걸을 때 발소리를 죽이는 일에 익숙해져서 이제 일부러 소리를 내어야 할 때 의식해야 한다고 했다. 이 차갑고 딱딱한 곳에서도 네 발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너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너는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할 말이라도 있어? 그럼 너는 날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일이 있어야 당신을 볼 수 있나요?"
어? 반문이 튀어나왔다. 너는 뒤로 발을 한 발자국 내었다. 당장 나가려는 사람처럼. 만들어 올게요. 꼭 네가 눈으로 그렇게 말한 것 같았다. 잠깐, 잠깐만! 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제 거의 밖으로 나간 네가 문을 닫다 말고 멈췄다. 네가 말하라는 듯이 날 보고 있었다.
"뭐든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내게 찾아오는 사람은 그러니까."
그러면 너는 눈을 내리 깔았다. 다시 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있긴 해요."
널 보러 왔어요. 그냥 그게 다예요. 너는 그렇게 속삭였다. 네 목소리는 작은 편이다. 하지만 선명했다. 나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러니까, 잠깐 곱씹어야 했다. 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서 있었다. 너는 말이 없었고, 그러니까 할 말을 지나치게 압축하곤 했다. 그런 말은 모호하게 해석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날? 너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끄덕였다. 너는 여전히 거기에 서 있었다. 보러. 하지만 무엇때문에? 내 얼굴이야 그때부터 봐왔을텐데,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나,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내가 싫었어요?"
네가 느지막하게 말했다. 네 눈은. 타워의 파아란 빛을 받아 검게 빛났다.
"처음에 네 이름을 물었을 때 아니라고 했잖아요."
아.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너는 다시 입을 닫았다.
"전에도 말했잖아. 나는 네가 아는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그 날은. 문득 손기척 소리가 났다. 조심스러움이 뚝뚝 묻어나는 소리였다, 자칫 지나치게 작아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였다. 영상을 지우며 돌아섰다. 저녁. 그것도 한밤중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이런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있던가? 들어오게. 낮은 계단을 내려왔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네가 서 있었다. 안 자요? 네가 눈으로 말한 것 같았다. 나는 웃었다.
"이 시간에 손님이라니. 그것도 너일 줄이야. 무슨 일이라도 있나?"
방으로 들어선 네가 문을 당겨 닫았다. 너는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는 했다. 네가 보는 건 주로 손이었거나 발이었거나 옆이었거나... 아무튼 눈은 아니었다. 그래서 새삼스러웠다. 타워는. 크리스탈 타워는 푸른 빛이 흘러나오는 곳이다. 네 노란 눈이 검게 빛났다. 너는 문득 움직였다. 발소리는. 울리지 않않다.
나는 네가 지척에 오기까지는 말을 할 줄 알았다. 아니었다.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목소리를 잃은 사람처럼 서 있었다. 너는 나보다 키가 컸지. 나는 어쩔 수 없이 살짝 고개를 들어야 했다. 네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어느 순간엔갸 네가 손을 들었다. 손은 내 뺨 근처에서 멈췄다. 손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괜찮아요. 당신도 사정이 있는 거지. 벗기진 않아요. 마른 목소리가 낮았다. 뺨에 닿은 네 손은 건조하고 어딘가 갈라지거나 튼 부분이 많은 듯 까슬거렸고... 차가웠다.
뭘 하려고. 왜 온 거지? 그런 말이 목 끝에서 맴돌았다. 안다. 너는 상냥했다. 너는 언제나 너는 뒷전이었다. 항상 남을 생각하고 항상 남부터 생각했고... 네 안위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그래서, 내가 부자연스럽게 얼굴을 가리고 다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겠지. 내가 나를 숨겨도 너는 묵인했다. 내가 너를 이용하고 있다고 느낄 텐데도 너는 그저 따랐다. 나는. 그러니까, 나는.
"안아봐도 돼요?"
"어, 응?"
너는 알고 있었다. 알아듣지 못해서 그런 멍청한 목소리를 낸 게 아니었다. 으, 응. 그럼. 얼결에 대답했다. 네 벌린 팔이 허리를 감싸고 팔 밑을 파고들었다. 나는 너를 마주안아야 했을까. 내게 그럴 자격이 있나. 그런 생각에 내었던 손을 거두었다.
용기사. 자신의 키보다도 큰 창을 자유자재로 휘두르고 하늘 높이 도약해 얻는 관통력으로 한 순간에 상대의 급소를 노리는 사람들. 그게 너였다. 그래서, 나는 네가 힘껏 안으면 아플 수밖에 없었다. 너는 나를 안았다, 으스러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하지만 나는 소리를 씹어삼켰다. 네 고통을 만들어낸 게 나일 테니까. 그러면 그 일부라도, 네 신음을 받아야 한다면 받아야 한다. 너는 상냥하니까,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눈치면 바로 손을 풀겠지. 그런. 거였다.
당신. 네가 중얼거렸다. 대답하지 않았다. 네 팔이 느슨해졌다. 나는 네 다음 말을 기다렸으나. 너는 더 말하지 않았다. 내게서 떨어진 너는 뭔가 석연찮다는 듯한 표정만 하고 있었다. 아마 네가 할 말이 내게 상처라도 줄까봐 망설였겠지.
"왜 그러나?"
으응. 너는 가볍게 부정했다. 나는 추궁하지 않았다.
"오늘 말이에요. 여기 있어도 돼요?"
"응?"
"싫어요?"
조용히 있을게요. 너는 느지막하게 말했다.
"그대는... 지쳤을 텐데. 여기는 보다시피 달리 침대도 없는걸. 마련해준 방에서 쉬는 게 어때?"
"잠이 안 왔어요. 미안해요."
"그, 그러지 말아. 나는, 그대가 있어도 괜찮아."
감기 걸릴텐데.
모험가는 잠든 수정공 위에서 그런 생각을 햇다. 흐린 바람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그가 언제부터 잠들어있었는지는 중요하지않다. 나는 아프지 않아. 타워에 이상이 생기면 아프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럴 일이 없었으니까. 그는 그렇게 말했다. 모험가는 가끔 그 말이 가슴 언저리에서 꿈틀거리는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불쾌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수정공은 잠을 잔 적이 없다고 했다. 잘 필요가 없다고 했다. 크리스탈 타워가 가까이에 있는 한 잘 필요도, 먹을 필요도 없는 몸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꼭, 당연하다는 듯이. 모험가는 그래서 불편했다. 하지만 그의 앞에서 말하지는 않았다.
죽은 것 같았다. 정말로, 모르는 사람이 지나가다 보면 죽은 게 아닐까 손목이라도 짚어봤을 듯한 모습이었다. 모험가는 어깨조차 오르내리지 않는 수정공 앞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검고 붉은 무릎 위에 펼쳐진 책에 마른 잎사귀가 떨어져 있었다. 모험가는 그 손에서 책을 빼내었다.
… … 죄식자에게 공격당한 사람들은 먹히거나, 죄식자로 변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체내 에테르의 구성은 어떻게 바뀌는가? 그 진행속도는 천차만별이다. 그 자리에서 바로 죄식자가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점차 멍한 시간이 늘어가다 이내 본능만이 남는 죄식자가 되기도 한다. 몸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데, 죄식자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언어 능력도 점차 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
모험가는 가름끈을 페이지 사이에 두고 책을 덮었다. 모험가는 수정공을 내려다보다가 가방에 책을 넣었다. 수정공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넷줄에 반쯤 몸을 기대고, 기울어진,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자세로. 모험가는 쪼그려 앉았다. 후드의 짙은 그림자 밑으로 엷게 머리카락이 보였다. 감은 눈도 보였다. 모험가는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모험가가 손을 내밀어 푸르게 굳은 손을 잡았다. 수정공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도, 모험가의 손길이 퍽이나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모험가의 손가락은 수정공의 손등에 얽힌 고리를 쓸었다. 손이 조금씩 움찔거렸다. 모험가는 손을 거두고 수정공을 올려다봤다. 헉, 조만간 수정공이 파득 떨었다. 모험가는 수정공의 팔을 잡았다. 그가 휘청거리다 뒤로 넘어질 뻔해서였다. 고, 고마워, 수정공은 후드를 끌어당기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무, 무슨 일인가?"
"밤이에요. 당신이 안 돌아와서."
"시간이 그렇게 됐나. 미안해."
모험가는 가방을 뒤적이다 다시 메었다. 모험가가 다시 일어설 때까지 수정공은 일어나지 않았다. 괜찮아요. 당신도 사정이 있는거죠. 수정공은 고개를 잠깐 들었다. 모험가는 말을 잘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제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까,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 사이에 감추어진 맥락을 읽어야 했다. 후드를 들추지 않았다. 모험가는 그런, 뜻에서 말했다. 그런…가. 수정공이 속삭였다.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모험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얼굴에서 말을 읽어내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었다. 수정공은 그넷줄을 붙잡고 일어섰다. 그네가 달강거렸다. 괜찮아,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인걸. 목소리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모험가는 움직이지 않았다. 앞서 걷던 수정공이 돌아봤다.
"너만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나는 괜찮지 않아요."
수정공의 입가에서 웃음이 걷혔다.
맞잡은 손이 차가웠다. 뜨거웠다. 낯설고도 익숙했다. 눈을 지끈 감았다. 목소리를 삼켰다. 입안에 남은 찌꺼기도 꾹꾹 씹어 삼켰다. 그래도 너는 몰랐으면 좋겠다. 내가 너를 얼마나 아끼고 좋아하는지 너는 몰라도 된다. 몰라야만 한다. 네가 언제나 불안을 지고 사는 걸 안다. 네가 했던 이야기를 기억한다. 잊은 척, 못 들은 척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나는 안다, 네가 내가 듣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했을 말인 걸 알았다. 그래서 나는 모른 척했다. 필사적으로 네게서 눈을 돌렸다. 그런 네게 다시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다. 나는 이미 충분히 널 고생시켰다.
너는 언제나 서글픈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하기 싫은 일이었어도 나는 네게 부탁해야만 했다. 네가 죽음의 손길에 손을 뻗으려 해도 나는 그걸 막아야 했다. 그게 내 사명이었으니까. 나는 네가 살기를 바랐으나 그건 너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너를 두 번 죽이는 셈이었다. 나는 알았다, 알았기에 나를 감추었다. 네가 나를 알지 못하길 바랐다. 내 기억을 잊었기를 바랐다. 너는 짧은 시간동안 수많은 사람을 만나서, 나를 잊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 목소리 정도는, 잊히고도 남을 시간과, 사람들이었다, 그랬다, 그랬어야 했어.
나는 너를 살린답시고 너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성견의 방으로 들어오는 네 낯빛이 파리했다. 괜찮느냐고 묻고 싶었는데, 나한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다. 그래서 나는 네게 의례적인 말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너는 처음에는 분명 보이지도 않는 내 눈을 보고 있었는데, 끝에는 내 눈을 보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 나는 나인 걸 알리지 않고 죽어야 했다. 네가 모은 빛을 끌어안고 차원의 틈에서 영영 괴로워하며 억겁의 시간을 살아야 했다. 그랬어. 그랬다. 그랬는데.
드드득, 팔이 부러질 것 같았다.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땅이 발을 이끄는 건지 내가 발을 디디는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안 돼. 안 돼, 가야한다. 가야 했다. 네가 빛이 되어버리기 전에 너를 살려야 했다. 온몸의 에테르가 뒤틀리는 고통에 네가 있으면 안 됐다. 그건 내 몫이다. 그래야 하는데.
"컥,"
눈앞이 까맸다. 겨우 지팡이를 짚고 섰다. 숨이 막혔다. 멈춰 있을 시간도 없는데, 빨리 이 지옥같은 감옥을 벗어나서 네게 가야 하는데. 입안이 비렸다. 어딘가 터진 것 같았다. 눈앞이 어두웠다. 옷감 안쪽을 뒤적였다. 전송 장치가 있던가. 딱 하나 있었다. 겨우 제대로 서서 숨을 가다듬었다. 그 정도의 에테르가 내게 남아 있던가. 그럴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르고… 해보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그대는 연말에 무얼 해?"
그 말에 모험가는 뚝 멈췄다. 모험가는 가끔 그랬다. 생각을 할 때면 하던 동작을 깔끔하게 멈췄다. 틀에 고정해둔 천에서 바늘을 빼던 모험가가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모험가가 바늘을 내려놓았다. 모험가는, 웬만해서는 상대를 보지 않는다. 그와 어지간히 대화를 자주 나눈 인물은 그렇게 말했다. 수정공은 문득 움츠렸다.
"아무것도 안 해요."
"응?"
"당신은?"
나? 모험가는 대답 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나는 여기서 도시를 관리하겠지. 늘 그랬듯. 위병의 보고를 받거나 주민들의 말을 들을 거야. 굳은 손가락이 움직였다. 천자락을 매만지는 손끝은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런 거예요. 늘 그랬듯. 모험가가 속삭였다. 그는 다시 바늘을 집어들었다.
[FFXIV]
장갑 정도는 끼고 하지 그래? 그러나 모험가는 한 귀로 흘렸다. 그는 습관처럼 그렇게 말했다. 씨알도 먹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랬다. 모험가는 제 몸을 아끼지 않는다. 그건 손도 마찬가지였다. 모험가는 그를 잠깐 쳐다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손을 움직였다. 탕, 탕, 망치질 소리가 울렸다. 그는 혀를 몇 번 차고는 다시 약연을 집었다.
"너 그러다 손 찍는다."
"몇 번 해봤어요."
"좀 조심해라."
"괜찮아요, 금방 나으니까."
"그거 보는 내 입장도 좀 생각하시지."
모험가는 대답 없이 장도리를 내리찍었다. 약연에서 약재를 걷어내던 그가 숨을 내쉬었다. 얕고 길었다. 모험가는 장도리와 망치를 내려놓고 다듬던 창을 집어들었다. 그는 한번 창대를 매만졌다가, 연결된 창날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그러다 천천히 일어섰다. 괜찮아요, 모험가가 속삭였다. 그 창도 의뢰냐? 그러면 모험가는 고개만 끄덕였다.
"약은 다 썼어?"
"아직 넉넉해요."
"어디 다치면 놔두지 말고 재깍재깍 씻고 바르고 그래라."
모험가는 가방을 챙겨들었다. 갈게요. 새해 잘 보내요. 그는 돌아보지 않고 손만 흔들었다.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모험가는 코끝에 내려앉는 시리고 푸른 공기에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흙이 바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모험가는 곧잘 걸어다녔다. 초코보를 부르지 그래? 그 아이도 가끔은 쉬어야죠. 모험가는 그런 말을 돌려주고는 했다. 그는 그래서, 날따라 유독 추운 숲에서 걷고 있었다.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리고 벌레소리가 들려도 그는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다. 어디선가 거미 전갈이나 키키룬족이 쫓아와도 그는 그저 시선만 돌려 확인하고는 뛰었다. 모험가는 결국 그런 사람이었다.
모험가는 언제나 조용하고 빠르게 칼라인 카페에 들어섰다. 길드 의뢰 접수처 테이블로 곧장 직진해서, 이거, 의뢰물이에요. 전해주세요. 그리고 인사를 건넬 틈도 없이 돌아서서 그대로 건물을 나섰다.
모험가의 목격담은 그때그때 달랐다. 아침에는 라노시아에서, 점심에는 커르다스에, 저녁에는 기라바니아에서. 그의 동선은 예측하기 어려웠고 신출귀몰했다. 그를 찾아 헤매느니 한 자리에 못박혀 있는 게 만날 확률이 높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모험가는 개의치 않았다.
새해 인사 정도는 하지 그래. 하지만 모험가는 그럴 필요가 있나,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는 축복을 믿지 않은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도 사람이었던지라, 기분이 동하기는 했다. 그래서다. 그래서 모험가는 굳이 뮨에게, 바데론에게, 모모디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살가운 사람은 아니어서 딱 거기까지로 그쳤지만. 그리고? 그는 막 생각난 듯이 모래의 집에 들렀다. 남아 있는 혈맹원 몇에게 눈도장도 찍고, 그러고는 용머리 전진기지에 가 에마넬랭의 실없는 이야기도 듣고, 랄거의 손길에 가 리세와 메나고도 보고, 돌의 집에서 타타루와 프라민, 굳센 바위, (남레젠환술사)에게 인사도 나누고... 그런 일을 종일 했다. 모험가는 밥을 걸렀다. 그 뒤에는 제1세계로 넘어가 율모어에, 여행길 여관에, 파노브 마을에, 똬리가지 마을에, 무의 대지에 들렀다. 생각난 듯 그의 요정을 불렀다. 요정왕의 분신이 그의 주변을 재빠르게 맴돌아도 모험가는 어색하게 웃고는 했다. 그런 일을, 꽤 오래 하고 나니 어느 새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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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의 빛전수정이 보고싶었던 것 같은데.... 쓰려고 묵혀놨던건데 아직도 묵히고 있는 걸 보니 아마도 안 쓸 것 같아요
새해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맞이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수정공은 빛전이 달리 신년맞이를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당연히 있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그게 자기라서 당황해하는 게 보고싶다. 였던 것 같고 그래요
영상이 사라졌다. 그걸 애써 확인하고 나서야 들어오라고 말했다. 문이 열리면 그가 서 있었다. 그는 늘 위태롭게 서 있었다. 당장에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서 있었다. 그러나 정말로 쓰러지지는 않았다. 그의 발소리는 낮았다. 아니,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다. 딱 발치에서 뛰놀다 그대로 짓밟혀 사라지는 듯이. 그 정도의 소리였다. 그가 내 앞에 선다. 나는 동족 중에서도 비교적 작은 편이다. 그를 보려면 조금쯤 고개를 들어야 했다. 그의 호박색 눈이 흐렸다. 침묵. 그게 그의 말이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음성에 실리지 않는다. 시선, 손짓, 호흡, 발길, 자세. 그런 것들에 그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는 조용했다. 문득 그가 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디선가 눈물의 내가 났다. 그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무슨 일 있었나?"
그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아마 아니다. 그는 굳세지 않다. 그는 강했으나 유약했다. 말하기 싫은 거겠지.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올라왔다가 허공을 맴돌았다. 그러다 다시 내려갔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의 말은 옅다. 정말 아무것도 아닐까. 그런 것들은 대부분 무언가가 있다. 짚고 있던 홀장을 고쳐쥐었다. 팔을 돌려 등에 매어둔다. 말할 수 없는 일이구나.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말을 뱉는다. 다시 시선을 옮겨놓으며 살짝 팔을 뻗었다. 그는 멈춰 있었다. 아. 나는 웃고 있었다.
그 팔이 느리게 허리에 감긴다. 뺨에 닿는 머리카락이 따끔거렸다. 소라가 나지 않을 정도로만 그의 등을 토닥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