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랍
18
아가리 글러가 된 기분이에요
↓ 이건,... 5.1이 한섭에 오기 전부터 구상하던 거였습니다
근데 5.1을 보고 캐해가 뒤엎히는 바람에..... 혼란 속에 드랍해버렸어요. 완성하고 싶었는데(ㅋㅋ!
퇴고 대충 했고 문법 검사기 돌리지 않았습니다...
이상하지, 그래 이건 이상해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내 심장을 도려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건 내가 될 수 있는가 나는 사람이 아니게 되었는데 그때에도 나는 사람일 수 있는가 그저 인형이 되지는 않는가 이미 흐려진 내가 아예 흩어져 파편이 되지는 않는가
그래서 나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내 탓이다 온전히 그리고 완전히 나의
실수야
*
수정공, 괜찮아요?
그 말을 열 번은 들은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반응하기가 애매했다. 안 괜찮아. 그렇게 말하면 무슨 일이냐는 말이 돌아올 테고, 거기에 답하는 것도 난감하고. 그래서 웃었다. 대답하기 어려운 말에는 웃음으로 얼버무릴 것. 자잘한 꼼수가 늘었다. 타워의 일부가 되고서는 수면이 절실하지 않았다. 며칠은 자는 걸 잊기도 했을 정도다. 수면은 시간을 때우기에 딱 좋은 수단이지, 어디서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하루가 길었다. 생각에 잠겨 죽어버릴 것 같을 정도로. 그때에만 종종 잠들었다. 버튼을 누르는 것마냥 쉽게 잠들 수 있었다면 좋았을테다. 온전한 사람이었을 때에도 그게 잘 안 됐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이 흐르는 대로 두는 시간들이 아까워 결국 다시 일어나고는 했다. 그런 식으로 며칠을 자지 않았다. 그랬을 때에도 피곤하냐는 말은 듣지 않았다. 안색이 나쁘다는 말을 하룻동안 이렇게 많이 들은 게 처음이었다. 나는 정말로 괜찮아…. 그런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 정도인가?"
"일년에 한번 보기는 했나 싶을 정도로 낯이 어두워."
그가 키득이며 내민 주머니를 받았다. 품에 안은 채 입구를 살짝 열었다. 어두웠다. 엷은 검정 속에 약물의 빛이 일렁였다. 그 중 하나를 집어 꺼내었다. 다시 닫으면 팔 위에서 짤강대는 소리가 났다. 어쩐지 저번보다 더 색이 짙어지지 않았나. 착각이겠지. 시럽을 입 안에 흘려 넣었다. 더 시어진 것 같은데. 눈을 꾹 감았다. 젤리 줄까? 웃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더 필요한 건 없고?"
"그래. 늘 신경써줘서 고맙네."
"이 정도로 뭘."
손인사를 하고 건물에서 나왔다. 해가 지고 있었다. 하늘에 불이 붙은 것 같아요! 노을을 처음 본 아이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지는 해는 타오른다. 그 빛이 사그라들면 어느덧 주변은 검게 물들고 건너편에서 흰 달이 뜬다. 하늘의 색은 붉은 빛에서 검푸른 빛으로, 검보라색으로 바뀐다. 어느 순간 달이 저물고 하늘은 다시 푸르게 밝아진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이들에게는 당연한 게 아니었다. 하늘은 언제나 하얬다. 그래서 하늘의 변화는 삶을 뒤바꾸기에 충분했다. 대부분은 그랬다.
경비병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조만간 다시 내려 올걸세, 문을 밀었다. 전송 장치에 다가가 손을 뻗었다. 에테르가 흔들리는 느낌은 썩 유쾌하지 않다. 크리스탈이 투명하게 반짝이는 복도를 걷는다. 언젠가는 이곳이 끔찍하게 싫었다. 사물 외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공간이었다. 파랑만이 가득한 건조한 곳. 발소리가 메아리로 귓가에 맴도는 곳. 그게 그렇게도 싫었다. 성견의 방 문을 열었다. 누군가 온 흔적은 없었다. 아직은 오지 않은 모양이지. 그대로 조금 더 걸어 방문을 연다. 선반 위에 주머니를 올려두고 방에서 나온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졸릴 때가 되었다. 안다. 그러나 잠이 오질 않았다. 눈은 뻑뻑하고 입안이 바삭하게 마르는데도 정신은 멀쩡했다. 백 년동안 이런 적이 없었는데. 조금 들떴나? 그럴지도 모른다. 앞머리를 손끝으로 쓸었다. 오른손에는 감각이 없었다.
"어디 가십니까?"
"산책을 좀 하고 오겠네."
"이 시간에 말입니까?"
"괜찮아, 금방 올 테니까."
…아, 교대시간이 되면 돌아가게. 그런 말도 덧붙인다. 계단을 뛰듯이 내려온다. 아무래도 장막 대문의 계단이 많기는 하지, 하지만 이제 와서 고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엷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훑었다. 바람이 부쩍 얌전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꽤 매서웠던 것 같은데… 사람들의 옷차림도 비교적 가벼워졌다. 봄인가. 문득 과수원에 시선이 닿는다. 색이 전보다 다양해지지 않았나. 봄이었다. 타워 안에 있다보면 계절을 금세 잊는다. 시간 감각이 무뎌지는 것도 금방이었다. 그렇구나. 그래서인 거지. 웃음이 새어나왔다.
격자무늬 철교를 지났다. 발 밑에서 죽은 잔디가 사박거리며 뒤척였다. 트리피드가 비척거렸다. 깡총풀이 좀 늘어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수정공. 이제는 거의 이름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름이 붙은 곳을 지나는 건 언제 겪어도 낯뜨거운 일이다. 위병과 이네롯에게 간단한 인사를 하고 갈림길을 지나쳤다. 조금 더 걸었다. 오랜만에 본 레이크랜드의 하늘은 맑았다. 검은 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반짝이다 지고 있었다. 잔별들의 강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달이 둥글게 발 아래를 비추고 있었다. 문득 태초의 호수가 보였다. 조심스레 걸어 바닷가에 섰다.
신발을 벗는다. 젖으면 귀찮으니까, 단순히 그게 이유였다. 로브 자락을 걷어올리고 발을 디뎠다. 발이 물에 스미는 기분도 오랜만이었다. 새삼. 그 모든 것들이 아주 오랜만이었다. 정말로 새삼스럽게. 그래서 조금 더 걸었다. 발목까지 닿던 물이 무릎으로 올라올 때까지 걸었다. 모든 바다와 호수가 으레 그렇듯 태초의 호수에도 갑자기 수심이 깊어지는 곳이 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발을 잘못 디디면 미끄러져서 물에 빠진다. 보통은 그렇게 된다. 고개를 숙여 발을 보고 있었다. 일렁이는 수면에 밤하늘같은 건 비치지 않았다. 흐린 달빛이 은은하게 부서지고 있었을 따름이다. 바람은 조용하지 않았다. 심술꾸러기는 아니어도 어린아이 정도의 활기를 띠고 불었다. 그래서 수면에 비치는 인영같은 건 없었다. 발이 저렸다.
뭍으로 올라온다. 레이크랜드의 바닷가는 바로 지척에 나무가 드문드문 자라 있었다. 벗어둔 신발을 집어들고 그 밑에 앉았다. 로브가 젖는 건 성가신 일이라 어느 정도 걷어두었다. 발이, 다리가 버석버석하게 마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착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른팔에 비치는 달빛이 부셔서 눈을 감았다. 몸의 수정은 점점 돋아나고 있었다. 어느 순간엔가 온몸이 결정으로 변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백 년 이후로 세기를 포기한 세월동안 수정은 팔 한쪽도 모자라 반대편까지 올라왔다. 그러니 어디선가 수정이 갑자기 자라나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문득 머리에 손길이 느껴졌다. 인기척은 느끼지 못했다. 홀장이 없었다. 끔찍한 예감이 스쳤다.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흐린 시야에 검은 인영이 비쳤다. 그림자는 손을 거두었다. 그는 소리 없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 낮은 말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 침묵을 안다.
"그대였구나. 놀랐어."
그러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시선을 돌릴 뿐이다. 그는 침묵으로 표현하는 법을 잘 알았다. 옆에 둔 샌들을 집어들었다.
"별 일 없어. 가끔 하는 일탈일 뿐이네."
대답이 없어 고개를 든다.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런 물음이 눈에 서려 있었다. 내가 거짓말을 왜 하겠는가…. 그런 말은 삼켰다. 그에게는 어떤 말도 농담삼아 할 수 없던 탓이다. 그는 수많은 사람을 잃었고, 등졌다. 단어 하나하나 그의 아픈 순간을 건드릴까 신중히 골라야 한다. 그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마중 나와준 건가? 미안해."
그의 고개가 흔들리는 걸 보았다. 바닥에 손을 짚어 일어선다. 돌아가자. 그는 그렇게 말하듯 몸을 틀어 걸었다. 돌아갈 곳. 네게 그런 곳이 있다면 다행이지만, 내게도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지만. 네게 그런 곳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가 돌아갈 곳은 별의 바다였으나 아주 약간의 유예를 얻었다. 그런 생각이 천천히 번졌다. 바닷바람에서는 눈물의 향이 났다.
그는 멈춰선다. 그의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라 굳이 무슨 일이냐고 묻지는 않았다. 그는 무언가 찾는 듯이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이 꼭 무언가를 말하려는 사람같아서 서 있었다. 그 검은 눈이 바닥으로, 숲으로, 그러다 다시 내게 향했다. 저 웃음을 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가 다시 돌아서 걸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시야가 흐린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발이 무언가에 걸렸다. 숨을 들이마셨다. 급하게 디딘 발이 미끄러졌다. 그대로 오른손부터 바닥에 닿았다. 어두울 시야에 허연 빛이 깜빡였다. 그는 앞에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괜찮아. 팔에서 자그맣게 빠득하는 소리가 났다. 불행하게도 그는 그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일어선 그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보이지 않는 얼굴을 한번, 손을 한번. 그렇게 번갈아보다 내민 손을 잡았다. 그가 끌어당겨 일어섰다. 손을 빼려 했는데 빠지지는 않았다. 아프지 않지만 그렇다고 빠져나가기는 힘든, 딱 그 정도의 힘이 손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눈앞이 밝고 어두웠다. 검은 얼룩이 부풀어 오르다가 퍽하고 사라진다. 빈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질끈 눈을 감으니 누군가 두개골 안쪽을 휘젓는 것 같았다. 기분이 나쁜가? 아니, 전혀.
손을 떼고 도로 고개를 들었다. 그는 날 보고 있었다. 그의 입은 지나치게 무거우나 눈은 솔직했다. 그건 걱정이었다. 그 눈에서 많은 말을 읽는다. 내리던 손이 멈췄다. 괜, 찮아. 가자. 입이 쉬이 떨어지질 않았다. 목소리가 떨린 것 같다, 그가 눈치채지 못했기를 바랐다. 그 손을 맞잡은 채 앞서 걸었다. 심장이 멈춰서 다행이다. 그 일렁임이 네게 닿을 일이 없어서 다행이다. 괜찮냐고 물어볼 법했다. 그러나 들리는 건 내 발소리 뿐이었다. 그런 침묵이 그의 다정이었다. 그가 무심하다니 모르는 소리다, 그는 말이 없을 뿐이다. 충분히 다정하고 무른 사람이다. 그 찬란함에 이끌린 사람들이 저를 무겁게 만들어도 끝까지 그 길을 나아가던 사람. 그게 그였다. 내가 원망스럽지는 않아? 말을 삼켰다.
서늘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친다. 감각 없는 손이 무언가에 막히는 느낌으로 그의 손이 잡혀 있다는 걸 알았다. 얼마간 걸었다. 그러다 문득 뒤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곧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다소 덩치가 큰 초코보가 서 있었다. 제1세계에서는 초코보가 귀했다. 그가 어디선가 구하고 길들인 걸까. 손아귀에서 무언가 빠져나갔다. 그는 이름 모를 초코보의 부리를 쓰다듬었다. 곧 그 위에 올라탄 그가 안장을 가볍게 두드렸다. 타라고? 작은 주억거림을 본다. 그래서 나는 올라탔다. 비공정과 아마로 외의 무언가를 타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땅이 멀어졌다. 하늘에서는 청량한 향이 났다.
나를 왜 데리러 왔어? 물어보지 않았다. 그건 네 자의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부탁인가? 그것도 묻지 않았다. 기대는 버려야 하는 무엇이다. 나는 그런 걸 감히 바라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래서는 안 됐다. 하지안 사람 마음이라는 게 뜻대로 됐다면 역사의 모든 일들은 예상할 수 있던 일들이 됐겠다. 기대하지 않으면 돼. 숨을 삼켰다. 웅크리고 싶었다. 보이는 건 네 등과 하늘 뿐인데. 그래서 웅크릴 수 없었다.
*
생각해보면 네 이야기는 들은 기억이 없었다. 펜촉 끝에서 검정이 번져나갔다. 너는 이따금 찾아온다. 모든 잡념이 그렇듯 느닷없이. 너는 입이 깨나 무거웠다. 그리고 정말이지 성실하다. 어떤 일이든 발 벗고 먼저 나서는 그런 네 성격이 좋았다. 그래, 너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다. 너와 사담을 나눈 기억이 흐렸다. 이단자, 울다하, 비공정, 이슈가르드.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펜을 내려놓았다. 의자에서 일어난다. 방문의 손잡이에 손을 댔다가 멈추었다. 창밖에서 바람이 덜컹거렸다.
어쩐지 너는 자주 외출했다. 누명을 뒤집어써 다니기 힘들텐데도 오랫동안 밖에 나가 있었다. 돌아오기는 했나 싶을 정도로. 불편한 자리에 온 어린아이가 도망치듯. 여기가 편하지 않다는 것처럼. 오늘도 그런가? 확인하러 가기에는 꽤 늦은 시각이었다. 문을 열었다가 알피노 공이나 타타루 양이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한번, 그래도 네가 정말로 없다면 어떡하지가 또 한번. 문을 밀어 열었다. 복도에 울리는 발소리가 거슬렸다. 응접실에 가지는 않는다. 오늘은 눈발이 얌전한 편이다. 불이 일렁이는 창문에 손가락을 대었다. 희뿌연 김이 사라진다. 경계는 그런 식으로 짜인다. 다시 걸었다. 문을 밀어 열었다. 찬 공기가 훅 끼쳐온다.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면 새파란 공기가 허파 안에 그득히 들어찼다. 커르다스의 밤은 조금은 가혹하다. 숨이 흐리게 피었다가 맥없이 흩어졌다.
소리가 들렸다. 그건 무언가의 울음소리였다. 짐승? 용? 희미한 소리가 북쪽에서 들렸었다. 짐승이든 용이든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울 리 없다. 누군가 있다. 할로네께서 잠든 이들의 머리맡에 앉는 시간. 동시에 아직 잠들 수 없는 이들의 손을 쥐어주는 시간대였다. 발밑에서 눈이 파삭였다. 무언가를 찌르는 소리가 들린다. 살갗이 찢기는 소리가 들린다. 검어 흐린 인영이 선명해질 즈음에야 무언가가 쓰러졌다. 그건 용이었다. 기사들 사이에서도 만만찮다고 소문이 난. 그런 용 아래로 붉은색이 번지고 있었다. 그와 용의 시체 주변의 눈이 드문드문 녹아 있었다. 나는 그 인영을 안다. 그는 찢기고 뜯겨 너덜해진 갑주를 입고 피투성이가 된 채 서 있었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롭게, 그러나 정지하기라도 한듯 의연하게. 왜 여기에 있지? 이 용은 네가 혼자서 잡은 건가? 아프지 않나? 그 모든 물음을 전부 씹어삼킨다. 네가 무슨 심정일지 짐작이 되지 않은 탓이다.
눈이 마주친다. 그가 내 발소리를 들었다. 당장 창을 휘두를 듯했다. 나는 그 모습을 안다. 그래서 멈춰섰다. 투구 아래의 눈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기를 거두었다.
"춥지 않아?"
처음 입 밖으로 내민 말은 고작 그랬다. 커르다스에서 피를 뒤집어쓴 채 시간을 보내는 건 동상에 걸리겠다는 선언이다. 그는 제 등 뒤의 용을 돌아봤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도 우선 돌아가자. 목욕이라도 하며 몸을 좀 녹이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가 아주 약간은 웃은 것 같다. 그가 발을 떼어 곁에 나란히 서고서야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차가웠다. 시렸다. 손끝이 스쳤다. 네가 모른척 앞서 걷는 걸 보며 기분탓이겠거니, 했다.
눈을 뜬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주위를 살피는 것. 검었다. 하늘의 끝과 수면의 끝을 구별할 수 없었다. 일어난다. 바로 뒤에서 후두둑하는 소리가 들렸다. 등으로 무언가 흐른 것 같았다. 물은 투명했다. 이상하게도 수면에 떠도는 빛조각이 없었다. 그런 주제에 몸은 확실하게 보였다. 이런 곳이 있을 리는 없으니 꿈이었다. 일어서면 축축했던 뒤통수가 금세 말랐다. 분명히 꿈이었다. 발을 디뎠다. 발밑에서 철벅이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듣는다. 쇠구두 소리였다. 철판이 맞닿아 부딪치는 소리였다. 고개를 돌리니 텅 빈 갑주가 서 있었다. 투구는 없었다. 갑주가 서 있는 건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움직였다면 그 또한 딱히 놀랄 일은 아니다. 둘라한은 자주 봐 온 탓이다. 마물처럼 돌아다니는 둘라한은 덩치가 꽤 컸다, 아마도 사람의 두 배 정도는 될 법한 크기였다. 그러나 갑주는 그렇지 않았다. 꼭 미코테족이나 휴런족들이 입을 법한 크기였다. 무기는 없었다. 그건 빈손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날 죽이러 왔어요? 아니면 나는 곧 죽게 되나요?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그건 말하는 대신 움직였다. 물소리가 무거웠다. 손이 뻗어져오는 걸 봤다. 어쩐지 가슴 안쪽이 따끔거렸다.
"내 앞에서 죽음을 말하면 어떡해."
내가 말을 했던가? 아니었다. 깜빡인 시야에 내가 서 있었다. 아, 내가 아니구나. 그는 내가 아니었다.
"나는 너라니까."
"내가 어떻게 너를 나라고 생각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당신은 이상하게도 친절하고 상냥하니까. 그는 곧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들으면 안 될 말을 들었는데 기뻐해야할지 잘 모르겠다는 사람처럼. 그저 난감하다라기에는 어떤 감정이 섞인 얼굴이었다.
"알면 그런 생각은 하지 마. 상냥한 건 너라고."
"날 잘 알면서 그런 말을 해요? 나는 이기적인 건데."
"그러면서 나는 생각 안 해주고?"
"그런 것도 포함해서."
그는 조금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웃지는 않았다. 소리없는 한숨은 자주 쉬었다. 그랬다고 자주 들었다. 그 시선이 바닥에 닿았다가 다시 오른다. 천자락이 쓸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손이 올라오다가 멈췄다. 별말 없이 눈만 감았다.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든 손가락이 차가웠다.
"여긴 왜 왔어?"
"모르겠는데. 당신이 부른 거 아니에요?"
"내가 너를? 뭐하러."
몇 번인가 머리를 쓸던 손이 떨어졌다.
"여긴 어둡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곳이야. 네가 오면 안 돼."
"너는 있어도 돼요?"
"지금은 괜찮아."
그러니 이제 가. 눈을 깜빡이자 텅 빈 갑주가 서 있었다. 시야가 흔들렸다. 아니, 시야만 그런 건 아니었다.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몸을 제대로 가눌 수도 없었다. 보이지않는 물결에 통째로 휩쓸리는 것 같았다. 그때까지도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서 있었다.
문득 모로 누워있었다. 식은땀이 흐르지는 않았다. 눈가가 시렸다. 손으로 더듬으니 축축했다. 울었나? 운 건 내가 아니었는데. 눈가를 벅벅 문질러 닦는다. 일어나 앉았다. 창밖이 어두웠다. 새벽이었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방을 나섰다. 칼라인 카페는 24시간 열려 있다. 새벽 시간대에는 주로 술을 마시러 온 모험가가 많았다. 아주 조용하지는 않고 적당히 어수선한 분위기. 그건 아마 뮨의 영향이 클 테다. 뮨이 아니더라도 그리다니아 사람들 특유의 성향 탓일 수도 있고.
물먹은 흙이 찰박거렸다. 비가 올 때는 물내음이 난다. 어딘가 짙고 습하면서도 서늘한 기운이 주변을 맴돌았다. 머리가 젖어갔다. 머리. 머리는 항상 차갑게. 나는 그게 안 됐다. 그럴 수가 없었다. 누군가 심장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비틀어 쥐어짜고 있는 듯한 불쾌감이 일었다. 어떻게든 외면하려 해도 항상 그림자 끝에 매달려 있었다. 그건 때로는 죄책감이었고 때로는…
당신이었지. 당신이었다. 네가 오면 안 돼. 그러는 당신은 울고 있었다. 당신은 떨지 않는 목으로 소리내고 있었으나 부러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머리와 가슴은 따로 논다. 뇌로는 괜찮다고 말해도 가슴은 그렇지 않은 법이다. 당신은 감성적이다. 당신은 이성이 아니었다. 당신에게도 그곳은 괜찮지 않다. 하지만 당신은 괜찮다고 했다. 나는 상냥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못한다, 당신을 나라고 생각하라고 했는데도 그것조차 할 수 없었다. 당신은 내가 아니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막사에서 쉬고 가셔도 됩니다. 괜찮아요. 고마워요. 키쉬와 코코아를 받아들었다. 사령부에서 나온다. 네거리를 지나 광장의 벤치에 앉았다. 보급품은 질이 좋지는 않다. 키쉬는 금방 물렸고 코코아는 너무 달았다. 빗줄기가 옅었다. 어쩌면 소낙비였을지도 모른다.